[종교와 정치] 불교의 경우에 대한 시론

종교와 정치

2007-10-26     김영두

  이상 우리는 법화경이 말세중생상을 화염에 쌓인 묵은 집의 도궤상과 거기서 살길을 경쟁하는 온갖 중생들의 투쟁상에 비유하여 상징적으로 그런것을 가장 고귀한 문화활동상에 비론해 본 것이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바라고 싶지만 만일에 혹 그런 경우도 있다할 것 같으면 종교가 거기에 대하여 유일의 구제의 손길로 남는 것이 아닐 수 없고,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구별되는 특징이 어떠한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때까지 엉성하게 더듬어온 바에서 거기에 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적을 한다면 부처님이 몸소 행하신 탁발걸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탁발걸식의 정치사상
  기독교에서도 후세사 수도원 생활에서는 그런 자취가 있지만 신과 예수가 그러한 행장이었던가는 필자로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불교의 탁발걸식인 것으로 물론 유교와 도교에서는 그러한 예가 없었던 것 같다. 종교성질상으로 불교만이 그럴 수 있는 부처님의 행장이신 것으로 생불불이(生佛不二)와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철저한 평등자비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복되게 구제하는 실천이 그러한 적극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온갖 그릇된 생각과 행위의 전도가 거기에서 바르게 서게 된다. 부처님께 희사함으로 그와 같이 감화되는 중생 스스로의 구제가 되는 때문이다.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고 스스로도 평등 자비가 되는 보시 자유와 수희(隨喜)가 이룩됨으로서이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공덕케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중생 자유를 행위 공덕으로 인도하는 최고급의 승리이게 하는 법력의 길을 택하여 탁발걸식 하신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물의가 될만한 행위가 아니냐 하겠지만 종교적 행위는 그러한 속된 차원과는 달리 도리어 그 반대적인 의의를 충족하고도 남음이 있는 비할 바 없는 승의(勝義)가 된다는 것이 주의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도덕적 관념인 선악이란 환경조건 따라 때묻은 그 나름의 것임을 면치 못하는 바, 기독교에서도 원죄를 지은 후에 선악을 알았다는 추방대상이 된 기록인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적인 선악이전의 절대순수선이 표준이 되는 것으로, 주의할 일은 불교의 것은 그것이 신의 절대의사주의라든지 권위주의 형식에서가 아닌 생불불이와 진속불이이기도 하는 중도의 것이라는 점이다. 부처님이 중생의 가장 불쌍한 사람모양의 표현이 되어 아만심과 법집이 없는 가장 전형적인 수법으로 나선 것이다. 그 법력에 감화되는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는 위에서 비쳤거니와, 부처님은 그것을 부유하고 빈한하고 간의 구별 없이 고루 평등하게 베푸시는 구제의 길로 나아가셨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중생의 아집 . 법집과 거기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자유를 순수선의 것으로 바꾸는 실천행이 되신 것이다. 그것이 중생으로서는 참아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인욕이 되어 부처님은 중생을 두고서는 인욕이 가장 중대한 공덕임을 역설하시었지만 그 실상은 인욕이 아닌 바라밀임을 다짐하신 금강경의 설법이시었다. 이것을 행하신 부처님의 탁발걸식이고 그 법력 교화의 그 이상일 수 없으리만,  한 중생의 사실에 따른 철저한 개과천선의 방법이 된 것이다. 중생 나름의 해석이거나 사회통념상의 판단이 문제가 아닌 종교로서의 권위가 그러한데 있는 바 우리는 그것이 중생에 대한 어떠한 효능이 될 것인가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 같은 분도 그러할 진데 하물며 중생인 인간에서랴. 법력에서 묵은 아만심인 아집과 법집이 눈 녹듯이 사라져 생불불이를 실천하는 평등자유의 자비희사가 자율 되는 수희감화가 이룩될 것이다. 해탈자유의 그것이기도한 바 이 정치 사상적인 의의는 형언을 다할 수 없을만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사회, 경제, 문화적 생활이익과 그 심성, 태도, 행위자유의 실천에서 성립하는 정치적 반영임은 두말할 것 없다. 이상으로서나 실제상으로나 그러한 맥락이고 더구나 이론상으로는 부동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바 같은데서 순수 정의의 온갖 선의 자유와 평등 번영이 될 얼마나 철저한 것이 될 것인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구체적 풀이는 생략하기로 한다. 정치와 사상이 문제인 한 보다 치자층이 관심되는 바 부처님의 탁발걸식이 의미하는 그 함축이야말로 더구나 이로 말할 수 없을만한 것이다. 여기서는 원래의 구상에 비추어 불교자체의 뜻에서 어쩌면 윤곽적으로나마 그 실상을 엿보게 하는 풀이를 해보기로 하여 부처님의 탁발걸식이 의미하는 소식을 교리교의(敎理敎義) 상으로 더듬기로 한다.
  부처님께서는 탁발걸식인들 차례로 또 일곱 집을 넘지 않는 한도로 그치시었다 한다. 지족(知足)과 중생의 삶을 고르게 아끼시는 표현이라 할 것으로 공자가 말한 누구와 더불어 하기에 군왕인자 아쉽고 부족함이 있겠느냐는 항의를 평화로운 정법으로 수행하신 것이다.

「중도(中道)」의 변증법적 종합 ― 정법
  앞서 불교가 여타종교에 대하여 변증법적 종합이 되는 어떠한 차원인가를 말한 바에 비추어 불교의 중도가 거기에 대한 어떠한 실상이 되는가를 보기로 한다. 중생인 인간이기로 그 세계가 다소간에 분열, 대립, 투쟁이 아닐 수 없는 변증법적 역사과정으로 술렁이는 것이다. 즉 전체(thesis) 반제(mtithesis)가 되풀이되는 인과법칙의 연속사가 되어 갈수록 착잡한 복합성을 띄우는 것으로, 문제는 과연 그러한데서 서양 변증법적 철학이 말하는 이상론적 지양인 변증법적 종합인 사실이 이룩되는 귀추가 되어지는가에 있다. 평화 아닌 대결, 투쟁에서는 엄밀한 의미에 있어 그럴만한 보장이 서는 것이 아니다. 일방의 승리와 타방의 패배만이 되는 곳에 그와 같이 되어지는 실제와 사실논리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복의 그칠 기약 없는 투쟁갈등만이 심각화할 중생자유의 속성임이 서양근대사에서 증명된 일이다. 그 원인과 이유가 더구나 민주주의의 인간자유, 평등이라면서 그 책임을 인간 스스로에 두지 않은 기독교 정신의 이데올로기 품(品)에 있다는 것도 증명되었으니, 이것도 기독교 정신을 어긴 자유주의 표현이라는 것이 명확하다. 즉 신앙적 신의주의 혼동이 되어 실은 현실의 되어지는 대로의 인간자유주의 행사이면서 그 결과는 신의 뜻의 자비정의대로 된다. 더구나 신앙적인 절대주의 행사가 되기 쉬운 일이다. 좋은 의미에서 인간의 낙천상인 중생자유주의면서도 하는 일의 책임은 신에게라는 책임전가라 할 것으로 물론, 신의 정의는 그런 식 여하를 막론하고 사정없는 준열로 나타날 기독교 신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대성과 함께 보다 본질적으로는 법이 표준이 되는 객관적 합리성이 근본원리가 된다. 그 삼계를 덮는 무변대의 것이 중생인 무명에서는 사량도 가려질 수 없고, 부처님께서도 불가사의라고 말씀하신 바 첫째로 신앙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리에 있어 그러함이요 인과법칙의 그것이고 보면 그 오묘무비(五妙無比)성일 따름이지 신의주의적 무조건성의 것은 아니다. 불교의 중도가 정법(정의가 되는 법)의 그것으로서 오묘 중의 오묘가 된다.
  부처님께서 그 정법의 객관성과 진리를 최고도로 상징한 탁발걸식을 하신 것이다. 중생의 온갖 역사적 변증법 현상에 대하여 참으로 정당한 변증법 종합인 정의로서의 진리자체의 자재인 바를 수행하시어 중생에 대한 영겁의 구제 몫을 수범하신 것이다. 동양의 도교가 자연의 도인 법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한 형식만이 된 것이 불교에서 그 실상정의의 그럴 수 없으리만한 최고보편타당성으로 실질 되어 현실이자 영겁무변대의 초월이기도하는 진리로 교리교의(敎理敎義)된 것이다. 유교의 특징인 인도주의가 생불불의의 불교이고 보면 보다 직통적인 인연관계가 됨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의주의(神意主義) 유교의 인도주의, 도교의 자연주의도 아닌 불교의 그들 변증법적 종합인 4차원 아니 초차원의 것임이 명백하다.
  주의란 따지고 보면 나름대로의 아집과 법집의 소산 아님이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되었기로 평등주의가 반제(反提)적으로 솟구치지 않을 수 없는 중도의 허트러짐이 되었다. 전제군주주의 대 민주주의, 관념주의 대 경험주의,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등 온갖 주의주장이 그러한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접종하였던 것이다. 중간형태인 귀족주의만 하여도 시대와 경우에 따라 전제군주주의 측이 되었는가 하면 민주주의 측이 되기도 한 중생 나름의 무명(無明)설레임이 된 것이다. 모두가 자유주의의 그것들임은 두말할 것 없다.
  불교의 중도만이 그러한 일체의 이상주의들을 그러한 체도(體度)가 아닌 현실이자 영겁의 정의진리로 진정한 변증법적 종합인 부동(不動)으로 황금(黃金)한 백선(白線)인 것이다. 그 법력의 무적(無敵)이요, 그렇기로 제천, 제신, 인간을 포함한 일체중생, 그리고 자연도 거기에 나붓기는 수희(隨喜)와 귀의로 자율되는 것이다.
  대승중도의 그 실상을 부처님께서는 불가사의라 하셨고, 조사들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는 점을 강조한 바, 「공」의 원리가 그것인 것이다. 중생인 탐. 진. 치 무명에서는 촌탁조차도, 주의(主義)적인 식견에서는 대일 것도 없는 천양지 판이한 말도 미칠 수 없는 정법 ― 정의로서의 진리 ― 거기에 합치하는 일체화의 소식인 것이다. 불가지(不可知), 무소득(無所得)의 그것이기도 한 바 어찌 이러쿵 저러쿵 당랑(螳螂)의 촉각 같은 인식 또는 지식 따위의 미칠바리요. 중생이 있다는 뜻의 유(有)도, 없다는 뜻의 무(無)도 아닌 공이요, 생불불이와 진속불이에 있어 현실법계의 중생과 자연등 삼라만상이 엄연히 있을뿐더러, 움직이고 되어지는 법대로가 아님이 없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중도(中道)인 것이다.
  자유, 정의, 진리의 무상무비(無上無比)의 충족인 무변대 탄력으로서의 그것인 바 부처님의 탁발걸식이 그것을 중생인간의 역사성에 즉(卽)한 정법자재의 몫인 불국토 마련의 실천으로 행하신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 있어 흥미 있는 일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이 기독교정신의 특징에서 불교적인 전환이 된 것 같은 증시(證示)가 그것인 것으로 독일의 동철학의 거장중의 한 사람인 말틴. 하이덱가가  무(無)를 시간적으로 철학하여 인간이 볍증법적 현실착잡의 막다른 골목 극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피안에 도약하는 무(無)의 투신(投身)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의 뜻과 품안에 안겨지는 그것인 것으로, 거기에서 구제되는 인간실존인 계기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이 와트킨스가 지적하였듯이 인간이 원죄탓으로 신과는 본질적으로 이율배반이 된 자유주의를 팽겨쳐 망상과 그릇된 행위를 완전히 백지화하는 신에의 투신과 거기서 신과는 무(無)가 되는 것이다. 그 철학 개조인 덴마크의 킬케가드도 그러한 기독교정신의 고민에서였던 것으로 주의할 일은 하이데거의 그 시간적 무의 실존주의 철학이 독일의 나치즘 독재전체주의에 대한 어용적 구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차대전에서의 나치즘 멸망후인 민주주의 회복기에 들어 하이데거는 드디어 불교의 참선(參禪) 도승(道僧)적 경지인 열반에 가까운 적멸 비슷한 영탄(詠歎)을 수상록에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실존주의 철학의 「무(無)」가 불교의 참선 화두인 「무」에 통할뿐더러 그 방법도 비슷한 것임은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그것과는 원리적으로 판이한 것이다. 일본의 니시라기다로(西田畿太郞)는 공간적인 무를 참선을 실천하는 사색에서 철학으로 엮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그것과도 구별되는 시공을 뛰쳐나는 무이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함께 자재하기도 하는 중도 ― 無卽有, 有卽無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인 것이다. 법계 실상의 그것이며, 실존 아닌 실재의 정법소식인 그것인 것이다. 제행무상인 일체현상이요, 그 윤회인 인과법칙에 회몰여가는 중생고뇌를 두고 거기에 상즉하는 중도실성인 부처님의 탁발걸식이며, 그 중생에 대한 도탈(度脫)구제의 무량무변대 법력자재인 대자대비 여래 대행(大行)이신 것이다. 현실이 즉 불국토인 그것이기도 한바 여래수량, 여래신력의 영겁, 불가사의이자 무량무변대의 형언할 수 없는 바로 법계소식임은 법화경을 참조하길 바란다. 끝으로 「절백비(絶百非)」인 중도 ― 공(空)의 원리임을 말해 둔다.

  追紀 : 3회에 걸쳐 본고중(本槁中) 특히 전2회에 걸쳐서는 필자의 책임에 속하는 학설과 당황하리 만큼의 어색한 표현이 된 자취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