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문학] 향가 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 (4)

피안의 감성

2007-10-26     김운학

  이 밖에도 유사 소재 향가에 있어서의 승려의 작(作)으로 우적가(遇賊歌)와 풍요(風謠)가 있다. 우적가는 원성대왕 시대의 영재(永才)스님이 지은 것이고 풍요는 선덕여왕 시대의 양지(良志)스님이 지은 것이다.
  먼저 우적가를 보자.
  제 마음에 모든 앞일을 모르러하던 날
  멀리 이 땅 지나치고 이제는 깊이 숨어가고 있노라.
  오직 그릇된 彼戒主(그대들)를 두려워 어데로 돌아가리.
  이 칼이사 지내고 나면 좋은 날이 새리니
  아 이만한 선(善)함은 무슨 새집이 되랴!
  성격이 강경하면서도 활발한 영재스님은 나이 90이나 되는 노령에 가서는 마지막 인생의 결론을 찾기 위하여 남악(지리산)의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참이었다. 흡사 최치원의 일인청산변불환(一入靑山更不還)하는 정신으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려는 길이었다. 그것도 다만 평범하게 세상을 도피해서 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려는 것이 아니고 최후의 결정적인 정신으로 왕생정토코자 하는 마지막 길이기도 했다. 영재스님의 성격상 그저 희미하게 여생을 마치려는 동기가 아님은 분명하다. 더욱 90이나 되는 고령이라면 이제는 갈 길이 급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정토를 찾아 일심으로 염불하다가 최후를 마치려고 굳게 각오하고 남악를 향하여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60여명의 도적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칼을 들고 노령의 영재스님을 해치려고 했다. 그러나 영재 스님은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목을 내밀고 칼로 쳐달라고 했다. 이에 도적들은 오히려 놀라며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물었다. 도적들은 이 스님이 바로 신라에서도 유명한 향가 작가인 것을 알고 더욱 놀랬다. 그들은 익히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이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스님에게 향가를 지어 달라고 했다. 이에 스님은 위와 같은 향가를 불러 준 것이다.
  내 마음에도 앞으로 닥쳐올 죽음과 두려움 등을 몰라서 이제는 늦어서야 재발심의 각오로써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이 몸 늙은 몸이야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니 몸에 대한 애착도 없고 다음 생의 평화만을 위하여 가는 길이다. 그대들의 그릇된 칼날에 두려워할 나도 아니다. 오히려 그 칼날에 의하여 내 목이 끊어진 다음 나는 밝은 새 삶을 찾으리라.
  그런데 그대들이 칼을 멈추고 나를 살려주는 것이 나에게는 무슨 즐거운 일이 못된다. 나는 이미 생사의 관념을 초월했다. 산중에 들어가 일념이 된 마음이나 지금의 일념 된 마음, 나의 목표도 끝마친 상태다. 나는 곧 죽음이 삶이다 라고 영재스님은 읊어 중 셈이다. 이에 도적들은 감동한 나머지 비단 두 필을 영재 스님에게 주었다. 그러나 영재스님은 웃으며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깊은 산에 숨어 인생을 보내려고 하는데 어찌 이런 것을 받겠는가고 그 비단을 땅에 던졌다. 도적이 이에 더욱 감동하여 칼과 창을 던지고 머리를 깎고 영재스님의 도제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한다. 실로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재스님의 초연한 태도와 그 입지는 결국 자신도 구제하고 60여명의 도적들을 구제한 것이다. 이 내용에 미타니 정토니 하는 말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장벽어굴산將避於窮山>이나 <불복적세不復踏世>같은 용어를 보면 영재스님은 분명히 90노령의 늙은 몸으로 마지막 미타정토를 향하여 정진해 가기 위함이 분명하다. 깊은 산 속에 묻혀 염불이나 하며 여생을 장식하려는 목표가 선히 보이는 것 같다. 김동욱씨는 이 우적가가 관음경의 <피소집도장彼所執刀杖 심은은괴尋殷殷壞>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 이를 관음사상의 가요로 보고 있으나 그 근본의 사상은 역시 미타정토사상을 그린 노래임에 틀림없다. 물론 관음사상의 일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재 스님의 근본사상은 왕생정토에 있었기 때문에 이 노래는 정토사상을 읊은 노래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다음 풍요(風謠)는 양지스님이 선덕여왕때 지은 민요체의 노래다. 이 노래는 양지스님이 영조사의 장육삼존불을 소상(塑像)할 때 고을의 많은 신도들이 이 서상(塑象)에 참여하기 위하여 진흙을 들고 줄지어 오는 모습을 보고 읊은 노래이다. 실로 간결하면서도 그 내용이 깊은 진지한 노래이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스럽더라
  스럽더라 그네들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
  영조사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무수히 올라오는 신도들의 행렬이 눈에 선한 것 같다. 양지스님은 신도들이 공덕을 짓기 위하여 올라오는 그 많은 수를 그저 몇 백이며 몇 천이며의 많은 수로써 표현하지 않고 계속 오고 또 오고 있는 무한대의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 의미상이나 시적 운치로 보아 훨씬 무게를 있게 하는 것이다. 양지스님은 그 법력과 기예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법력만 해도 석장(錫杖)위에 포대만 걸어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신도 집에 날아 가서 흔들며 소리를 내었다. 그리하여 그 신도 집에서는 제(齊)올리는 필요한 비용을 넣어 포대가 차면 다시 날아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이 스님이 거주한 집은 석장사라 부르기도 했다. 그 신력과 법력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그뿐만 아니라 스님은 기예에 능하여 위와 같은 가요도 잘 지을 줄 알았지만 그 서화나 조각의 솜씨는 또한 비길 바 없이 훌륭했다. 양지스님의 조각품만 해도 영묘사(寺)의 장육삼존이며, 천왕상, 그리고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 天王寺) 탑밑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또한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도 썼으며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 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하기도 했다.
  양지스님의 다재 다능과 기예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양지스님이 정성스럽게 영묘사의 장육상을 조상할 때 더욱 고요히 정에 들어 삼매의 경지에서 흙을 빚고 문지르며 조상에 임하니 그 경건하고 고상한 불사의 태도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하고 훌륭한 불사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 수 없어 모든 성내의 신도들은 너 나 없이 다 그 조상에 필요한 진흙을 한 웅큼씩 집어들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양지스님은 이 갸륵한 신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 업장이 두터운 중생들의 죄업이 다 이 공덕으로 소멸되어 없어지기를 기원해 주었던 것이다. 여법하게 행하는 스님의 불사와 이에 깨끗한 마음으로 동참하는 신도들의 마음을 잘 그려놓은 훌륭한 가요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노래는 영묘사의 창건이 선덕여왕 4년(635)이니 서동요 혜성가 다음 가는 오래된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다음 남은 향가 중에서 원가(怨歌)는 신충이 효성왕의 약속을 지켜주지 않음을 원망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을 때 잣나무가 말라버렸다는 불교의 주력적인 효과가 나타난 노래고 헌화가는 성덕 왕 때 강능 태수로 부임해 가는 순정공의 부인 수로부인의 청에 의하여 바닷가에 임한 천길 높은 절벽 위의 철쭉꽃을 한 소를 몰고 가는 노인이 꺾어 주며 지은 노래로 이 노인은 관음화신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것은 노옹을 도교적 선옹(仙翁)으로 보려고도 하나 이 노인이 해변의 절벽에서 꽃을 꺾어 주었다는 점, 또 수로부인이 바다용에게 붙들려 갔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해가사(海歌詞)를 부르게 하여 이를 구해낸 것 등을 참작해 보면 「해안고절처海岸孤絶處 보타낙가산寶陀洛迦山」을 상주처로 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경우와 이 관음의 우보처(右補處)의 시호로써 해상용왕이 시립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여 먼저의 노옹과 후의 노인은 동인이역의 관음화신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헌화가는 제 49대 헌강왕이 개운보에 나왔다가 동해용왕을 위하여 절을 지어주고 그 아들 처용을 데려 왔는데 이 처용이 괴신이 밤에 자기 아내를 침범한 것을 보고 지은 노래로서 체념과 인욕의 미덕을 보인 아름다운 노래다.
  또한 모죽지랑가도 효소왕대 낭도인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며 인간의 무상을 읊은 노래로 유사에 실린 바 향가는 다 불교적인 사상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