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생속의 내생(來生)

삼성산(三聖山)

2007-10-25     관리자


(1)후생이 있는가

부처님 말씀에 『전생 일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는 이것이요 내생 일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짓는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의 현실은 과거의 결실이며 미래의 원인이어서 긴 생명의 시간을 잇는 오늘은 자못 그 의의가 깊어진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연기의 법에는 하나의 존재가 이와 같이 단순한 하나가 아니요, 거기에 무한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런 의미는 인간 존재에서 예외일 수 없다. 역시 오늘의 생애가 전생이라도 오늘을 앞선 생애를 인정하였고 또한 내생이라는 오늘의 원인이 가져 올 결과적 생애를 또한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주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가 전하는 그의 전생설화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돌린다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오늘도 곧잘 이 전생 이야기를 말하는 소재를 만난다. 필자가 불교사회에서 늙은 탓인지 몰라도 전생 아무 것의 후신이라는 몇 가지 사례들을 알고 있다.

(2) 이 사실을 보면서

그리고 이 전생과 현생의 필연적 관계를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자료 중에는 의례 전생 현생을 연결하는 하나의 인자 적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담겨진다.
그것은 착한 일을 했더니 후생이 어떻다 든 가 모진 일을 하더니 후생이 어떠어떠하다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전생 후생담 속에 담겨져서 오늘날의 사람들이 더욱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들거나 신기한 이야기로 삼게 하거나 아니면 허망한 이야기로 만들게 한다. 그리고 좀 알만한 사람사이에서 그런 것을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막고자 해서 방편으로 지어낸 이야기다라고 말하게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른 판단인지 하여튼 다음의 삼막사(三幕寺) 돌 조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서울 남쪽에 웅거하여 우뚝 솟은 산이 바로 관악산이다. 이 산 서쪽에 독립한 봉우리가 삼성산(三聖山)이고 중앙에 솟은 봉우리가 연무대가 있는 관악산이고 동북에 솟은 봉우리가 청계산이다. 관악산에는 옛적에는 16개동(棟) 사찰이 있고 그 중에도 삼막사는 이조 말까지는 동 불암 서 진관 남 삼막 북 승가라 하여 서울의 기도사찰로서 대표로 꼽는 사찰이다. 삼성 산에는 옛날부터 일러오는 일막 이막 삼막의 절이 있어 지금은 삼막사만이 남았지만 원효, 의상, 윤필의 3분의 대사가 각각 삼막에 머무셨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중 삼막사는 과연 만고의 절경이다. 아마도 태고 때부터 오늘에 붉게 타며 끓어오르는 듯하여 낙조를 대하면서 누구도 감히 입을 벌리지 못한다. 지금도 훌륭한 스님들이 계셔서 삼막의 역사를 빛내고 있지만 옛날부터 이곳은 염불 당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염불 당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수행력과 그리고 그에 따른 시기한 이적들을 필자도 듣고 또한 보아온 바이다. 뇌호(雷湖) 스님이 바른손에 광쇄채를 왼손에 북채를 든 채 염불 끝에 단정히 긴 삼매 속에 드신 일이나 염불 당에 계행 없는 사람이 들어 왔다가 망해루 앞 절벽에 솟은 느티나무가지에 동이 쳐져 허리띠가 대롱대롱 매달렸던 사실들은 필자도 목도한 바이다.
(3) 수각 시주 김풍연

헌대 여기 수각에는 아까도 말했지만 재미있는 전생설화를 오늘도 말해주고 있다.
삼막사 막사 앞에는 커다란 돌 수각이 있어 지금도 관악의 정기를 담뿍 담고 있다. 그 모양이 재미있어 돌 거북의 등을 파서 물을 담아 놓은 것 ㅡ 그리고 그 돌에는 수각 시주 김풍연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여기 김씨는 지금부터 60년 전인 1916년에 죽은 사람이다.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서울 안국동 뒤 경기고등학교 뒷 고개를 황토마루재라 했는데 김씨는 바로 이곳에 살던 분이다. 이곳 삼막사에 정성을 모아 참배하고 재가생활 중에도 신행을 지켜온 독실한 염불도였다. 그가 죽은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병진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경북 영양에 가서 태어났다. 그가 김풍연 후신인지는 무엇으로 증거 하느냐고 성급하게 묻겠지만 아기의 등에 한문으로 글자가 씌어져 있었으니 『三幕寺 水角施住 金豊淵』이라 씌어 있는 데야 어쩌겠는가. 그가 이씨 댁이었다. 이씨 댁은 아들이 없어 부처님께 기도 드렸다. 그러기를 얼마 후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때가 이씨는 48세라 하니 어지간한 만득이다. 영양 땅에 살던 이씨가 삼막사를 알리 없고 김풍연을 알리 없다. 여러 스님 여러 절에 물은 결과 마침내 과천 관악산 삼막사인 것을 알았다. 이씨는 아들 등에 적힌 신비를 풀고자 하루는 긴 나그네길을 나섰다. 나귀를 타고 뚜벅뚜벅 과천에 이르러 삼성산을 찾아 삼막사에 이르렀다. 그 때 주지스님의 이름은 지주화(池柱華) 스님이었다. 주지 스님의 안내로 이씨는 우선 수각을 찾았다. 분명히 수각시주 김풍연이다 그 때 비로소 주지 스님에게 찾아온 전말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김풍연이라는 수각시주가 어느 곳에 살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때서 마침내 이씨는 황토마루재 김풍연의 집에 이른 것이다.
이씨는 김씨 댁 사랑에 닿아 과객이라 하고 묵었다. 그러면서 집안을 살폈다. 안에는 상청이 차려 있었고 주인은 상재다. 수일 만에야 주인을 뵙기를 청했다. 그리고 복상은 누구의 상인가를 물었더니 가친(家親)이라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김풍연이었다. 여기서 이씨는 상제에게 찾아온 내력을 자세히 말했다. 김씨 댁에서는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기고 자기의 아버지의 후신을 보고 싶어했다.
집안간의 오랜 숙의를 거쳐 아버지 후신(後身)을 만나고자 영양 길을 떠났다. 며칠이 걸려 두 나그네는 영양에 도달하였다. 아기가 아닌 아버지를 보기 위하여 수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뒤늦게 얻은 아기를 바깥사람에 내보이기에도 그만한 수속이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그 때 풍속이 귀한 아기를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밖에 내놓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가의 아들이 찾아 왔는데 어쩌겠는가. 사랑에 나온 아기는 엉금엉금 김씨 앞을 기어갔다. 그리고 그 무릎에 기대어 엎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릎에 기대어 엎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정이 사뭇 편안하다. 이에 아기의 옷을 헤치고 등을 보니 거기에는 『三幕寺 水角施住 金豊淵』의 열자가 뚜렷하다. 나그네 김씨는 일어섰다. 그리고 의관을 새로이 하고 아기 앞에 정중히 두 번 절했다. 비록 아기일망정 그는 분명 자기의 선친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생전에 그만치도 절을 좋아하고 염불을 좋아하더니 이 댁에 인연이 있어 태어난 것을 아들은 감격스러워 했다. 이쯤 되면 이씨와 김씨는 남이 아니게 됐다. 사돈에는 촌수가 닿지 않듯이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뭐라고 이름 지울 수 없는 사이지만 여기에는 정신적인 동기의식이 우러난 것이다. 이씨의 집은 그대로 살만했으나 재산 형편은 김씨만은 못했다. 김씨는 논 2백 석 지기를 이씨에게 나누어주었다. 따져보면 아버지 재산이 아들 재산이 되었고 아들 재산의 그 일부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간 것뿐이다. 그리고 두 집안은 한 동기와 같이 오래 화목을 나누어 갔다.

(4) 금생(今生)은 삼생(三生)

이것은 설화가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삼막사 수각 돌에 새겨지듯이 오늘까지 살아있는 삼막사가 간직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그 전생을 알았고 또한 전생의 상속으로서의 후생을 보는 것이다. 염불하고 불전에 공덕을 닦으라 한 것이 한 낯 권선징악적인 조작 설이 아니고 하나의 사실임을 본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설명이 되고 안 되고는 상관이 없다. 하여튼 성실히 부처님 믿고 염불 좋아했고 절에 시주했고 그는 죽어서 전생의 수많은 일 가운데 유독 수각 시주한 사실만을 등에 기록하고 이 땅에 다시 태어났다. 이것을 무어라고 봐야 할는지. 전생 이야기는 허망한 이야기일까. 내생 이야기는 씨알머리없는 이야기일까.
불전 시주가 절을 살찌우기 위한 허망한 소리거나 아니면 착한 마음 가지고 살라는 방편 설일까. 오늘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