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색 비구니(蓮華色比丘尼)의 오도(悟道)

영산(靈山)의 향풍(香風) (2)

2007-10-25     관리자


(1)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의 가치
사람이 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그것이 오늘 일로 현실화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위치하는 상황을 의식한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대치하고 그 결과 어떻게 될지 확실히는 알 길이 없다. 사람의 능동적 의지는 부단히 새로운 것을 향하여 전진하지만 역시 그 결과는 단언 못한다. 이와 같이 나 밖에 있어서 나에게 영향하여 오는 것을 대개 운명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다의 물결과도 같아서 그 속에 몸을 담근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조류에 끄달려 흘러간다. 손발을 버둥대며 얼마간 제 의지를 펴보지만 역시 발버둥으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운명적인 상황은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듯도 하고 어쩌면 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또한 무모한 헛짓인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기가 의욕 했던 혹은 운명이라는 상황여건에 빠져들었던 그것이 부처님법과의 만남을 인연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장 값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자기 야망대로 뜻을 이루고 운명의 물결을 휘어잡아 꿋꿋하게 자기의 의욕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생멸이라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흥망도 성쇠도 다 그 속의 것이다. 자율도 타율도 부처님 법과의 인연이 없다면 모두가 가을이면 낙엽으로 떨어져야할 운명임에는 다를 바 없다. 설사 백가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가지 고난에 부딪쳐서 기구한 운명의 골짜기를 헤매었다 하더라도 불법과의 인연을 만났을 때 그때까지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커다란 승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디딤돌이이였으며 밝은 길을 찾아가는 좁은 길이었을 것이다. 연화색 비구니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이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고난이 깊을수록 해탈을 찾아야 하고 어둠이 짙을수록 밝음을 찾아 노력하여야할 것이 아닐까! 설사 어떠한 고난을 당하거나 절망적 상황 속에 빠졌더라도 불법을 한번 만나면 즉시에 크게 사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마등가」여인의 오도 인연을 보았지만 오늘은 연화색 비구니의 오도인연을 적어보기로 한다.
(2) 연화색의 기구한 반생

부처님께서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 일이다. 그 부근에 연화색이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사윗감을 고르기에 부심 하게 하였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울선국」이라는 곳에 사윗감을 찾아내고 시집보냈다. 연화색이 아기를 갖게 되자 그 나라의 풍습에 따라 친정에 돌아와 아기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다. 연화색의 기구한 팔자는 여기서부터 벌어진다. 연화색이 집에 와 있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장모인 연화색 어머니와 부정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종이 엿보고 있다가 모두를 연화색에게 고하였다. 연화색은 생각하였다. 『한 남편을 모녀가 섬긴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차라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결심하였다. 그녀는 집도 아이도 버리고 뛰쳐나갔다. 텅 빈 가슴을 안고 정처 없이 쏘다녔다. 그리고 미친 듯한 형상이 되어 구걸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피로에 지쳐 「바라나」성 교외 길가에 쓰러졌다.
그 무렵「바라나」성중에 한 장자가 있었는데 상처하여 홀로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울적한 마음을 잊으려고 교외를 산책하다가 길가에 앉아있는 연화색을 발견하였다. 남루한 몰골, 피로한 모습이지만 장자는 연화색을 한번 보자 감동을 받는다. 연화색의 기품과 아름다움에 그는 충격을 느낀 것이다. 연화색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당신은 남편이 있습니까? 남편이 없다면 내가 홀몸이니 나의 아내가 되어줄 수 없겠습니까?』하고 정중히 물었다. 사실 이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구애 혼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전하고 있다. 연화색은 얼마간 망설이다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큰 부자가 됐다. 남편은 사방에 다니면서 무역을 하였는데 한번은 「울선국」으로 갔다. 어느 날 소녀들의 무용놀이를 구경하였는데 그 놀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중에 한 소녀의 무용은 훌륭하였다. 연화색의 남편은 그 소녀를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 소녀는 연화색이 집에 두고 온 딸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런 일을 알 리가 없다. 그는 주위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고 마침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사위가 되겠다고 청혼하여 천 량의 돈을 내고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바라나」국에 돌아왔다. 어머니인 연화색과 한 집에서 정답게 살았다. 연화색은 조금도 질투의 빛이 없이 소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구한 또 하나의 사건은 터졌다. 연화색이 소실의 머리를 빗겨주고 곱게 단장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고향이 어디냐? 아버지가 누구시냐?』
그녀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는 자기가 낳고 버리고 온 딸이 아닌가! 그녀는 놀랐다. 어쩌면 이같이도 두 번씩이나 모녀가 한 남편을 섬기게 되는 것일까? 저 때는 어머니와 한 남자를 섬기고, 이번엔 딸과 함께 한 남자를 섬기다니!
그녀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3) 부처님 법을 만나다.
짧은 인생이라 하지만 곡절도 많다. 연화색이 아니더라도 이쯤 되면 실성하지 않을 사람도 드물리라. 그녀는 사방을 방황하다가 「왕사성」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마침 「목건련」 존자가 교화하고 있었는데 그녀는「목건련」 존자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이 밝아옴을 느꼈다. 그녀는 「목건련」 존자의 인도로 마침 「죽림정사」에서 설법하시는 부처님을 찾게된다. 우거진 대숲, 넓고 훤출한 강당,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대중, 그 모두를 위압하듯이 혹은 포근히 감싸듯이 울리는 목소리, 부처님의 설법을 만났다. 환희심을 이길 수 없었다. 부처님 앞에 이마를 조아려 예배드리고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부처님의 설법은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가슴을 씻어주고, 거치를 대로 거친 그녀의 마음에 따사로운 봄빛을 채워 주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욕심과 갈애심으로 살려고 헤매지만, 마치 장님이 황야를 헤매듯 소득이라고는 심신의 상처뿐이고 마침내는 죽음을 반복하고 마는 것이 그녀에게는 환히 보였다. 연화색은 미모에 못지 않게 팔자도 기구했지만, 그녀의 마음씨는 누구에게 지지 않게 곱고 아름다웠다. 부처님 말씀은 그녀의 맑은 눈과 온 몸을 통하여 가문 땅에 봄비가 스미듯이 남김없이 흘러들어 갔던 것이다.
『지혜를 어지럽히는 것은 야심과 욕심이니 마음에 탐욕의 불길을 꺼야 하느니라. 내 것으로만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비워야 하느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삼보를 공경하며 노력과 재물과 지혜와 정성을 다하여 보시를 행하라. 그대들 마음에는 시원한 바람이 차 오고 그대 앞에는 평화와 우애와 행복의 큰 길이 열리리라. 현생에서는 안락을 누리고 다음 생에는 천상에 태어나리라. 욕심을 부리면 마음속 불길은 더욱 치성하게 타오르고, 지혜의 눈은 어두워지고 몸과 환경의 터전은 거칠어만 간다. 그리고 다음 생엔 지옥에 떨어지니 마땅히 탐욕을 버리고 널리 보시를 행하여 바른 지혜를 닦아라.』하시는 부처님의 설법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말끔히 씻어주고 억겁의 어둠을 한꺼번에 허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설법은 다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 )의 지리를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모두가 고(苦), 그것은 번뇌망상이 모여서 이룬 것, 참된 진리의 언덕은 허공같이 말끔하여 청정하니 마땅히 도를 행하여 열반을 이뤄라. 부처님의 간곡하신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연화색의 마음은 밝음이 가득하고 번뇌의 그름은 흔적을 볼 수 없게 되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이것이 고(苦), 이것은 번뇌, 이것은 모두가 없는 것 이것은 도행(道行)...... 연화색의 마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드러났고 그녀의 가슴에는 만고청풍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법안정(法眼淨)을 얻은 것이다. 그녀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절하고 엎드려 말씀드렸다. 출가를 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를 허락하시고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에게 보내어 득도시키게 했다.

(4) 도를 이루다.
비구니가 된 후의 연화색은 그녀의 천품의 덕성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 그녀의 수행은 정밀했고 그녀의 정진력은 견고했다. 그녀는 얼마 아니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대 신통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이와 같이 큰 도과를 이룬 뒤에도 경건한 수행자의 자세는 더욱 견실했고 덕행은 보름달과 같이 뚜렷했다. 「아라한」이 되어서도 비구니임을 잊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 하나하나는 그녀의 온 언행을 통하여 전단향처럼 풍겨 나왔다. 비구를 존경하는 팔경법을 아름다울만치 지켰다. 흉년이 들어 걸식이 어려울 때 그녀가 탁발한 음식은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자기는 굶어서 노상에 쓰러진 일도 있었다. 비구니가 되어 백살이 되더라도 새로 수계한 비구에게 절하며 비구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비구에게 지도를 받으라는 비구니에 대한 팔경법 가르침은 그녀의 덕을 더욱 빛나게 했다. 연화색 비구니의 도덕과 덕행은 널리 알려졌다. 한번은 산에 모여 살던 도적들도 연화색의 도덕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들은 연화색 비구니에게 무엇인가 공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잔뜩 장만해서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그리고 산을 향하여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산 속에 대 실력자가 계시거든 이것을 가져다 잡수십시오.』
연화색은 그 산 깊은 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천의 통으로 그 소리를 듣고, 천안 통으로 그들의 거동을 보았다. 곧 식차마나(예비 비구니)와 사미니를 시켜 그 고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끓여서「기사굴산」에 있는 비구 스님들에게 공양시켰다. 남방 tm님들이 현재도 몇 가지 고기를 먹는데 이것은 연화색 비구니의 공양에 연유하는 것이다.
연화색 비구니의 경우를 생각할 때 그녀의 출가 이전의 잔혹하다 할만한 운명이 그녀를 죽는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만약 척 남편에게서 행복하였거나 두 번째 결혼에서 불행하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대 아라한」 연화색 비구니는 없었을 것이다. 세간 적 행복이나 성공이 얼마만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세간적 성공이 문제가 아니다. 세간 적 고통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인생순환의 수레바퀴가 돌고 돌다가 나타난 양달이거나 응달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돌고 돈다. 이 고뇌의 수레바퀴에서 뛰쳐나오는 기연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경사라 하여야 할까? 불행이라 하여야 할까? 연화색 비구니의 생애는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