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1

2007-10-25     관리자


시가문학(詩歌文學) 오랜 옛부터 존재해 있었다고 생각 해 볼 수 있다. 그 구체적 형식에나 내용 같은 것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중심한 신(神)에의 찬양이나 기원(祈願)에 대한 서사시적 문학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이 간다. 그리고 많은 대중과 집단이 가볍게 외울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형태였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신라 14대 유리왕대에 도솔가를 지었다는 것도 이러한 형태의 발달된 한 장르에 불과했을 것이다.
현존한 가사로서의 최고의 향가는 서동요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왕력(王曆)과 같이 법흥왕(514 ㅡ 540)이후를 중고(中古)라 구분한다면 신라의 중고를 접어들면서 향가는 나타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향가는 법흥왕이 불교를 선포한 뒤 불교가 한창 성할 때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다음 향가 연대를 도시(圖示)해 보면,
사구체(四句體)ㅡ 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
진평왕대(眞平王代) 선덕왕대(善德王代)
600년 이전 635
헌화가(獻花歌) 도솔가
성덕왕대(聖德王代) 경덕왕대(景德王代)
702ㅡ737 760
팔구체(八句體)ㅡ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처용가(處容歌)
위소왕대(爲昭王代) 헌강왕대(憲康王代)
692ㅡ702 879
십구체(十句體)ㅡ혜성가(慧星歌) 원왕생가(願往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문무왕대(文武王代)
579ㅡ632 661ㅡ681
원가(怨歌) 제망매가(祭亡妹歌)
효성왕대(孝成王代) 경덕왕대(景德王代)
737 742ㅡ675
안민가(安民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경덕왕대(景德王代) 경덕왕대(景德王代)
742ㅡ765 742ㅡ765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과적가(過賊歌)
경덕왕대(景德王代) 원성왕대(元聖王代)
742ㅡ765 785ㅡ798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고려광종대(高麗光宗代)
967이전

이것으로 보면 신라시대의 가장 늦은 것이 헌강왕 5년의 처용가가 되어 유사(遺事)의 향가 는 약 300년이고 거기에 다시 고려 광종 24년(973)에 입적한 균여(均如)의 전(傳)의 것까지 합하면 향가의 시기는 약 400년에 달하는 셈이다. 물론 균여 대사는 신라에서 낳아 신라에서 성장했으니 그의 보현십원가도 신라의 향가 군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며 이렇게 볼 때 향가는 다 신라불교의 성황 했던 시기에 불교적 내용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향가기의 사회상을 보면 신라에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뒤 모든 정치와 군사를 불교에 의하여 수립하고 배양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다시 당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여 한반도의 황금시대를 이루던 때 인만큼 그러한 찬란한 문화의 편린들이 아무래도 그때의 유산인 향가에 나타났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신라를 흥륭(興隆)케 하고 신라의 창조한 불교의 영향과 그 안에서 이 힘의 정화로 나타난 화랑의 힘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라 문화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에다가 외래문화 즉 불교가 들어와 융합된 새로운 문화였지만 여기에 화랑도라는 아름답고 참신한 미풍이 생겨나 신라재래의 풍속에도 또한 적극적인 대승불교에도 알맞는 이상경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라 고유의 문화는 점점 불교화 하면서 화랑은 불교와 일치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전쟁에 나아가 임전무퇴의 금강력을 보이기도 했고 또한 훌륭한 풍류와 예술의 시경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은 인격을 도야하기 위하여 의도로서 서로 탁마하고 정서를 함양하기 위하여 가악을 많이 지었는데 그들은 시작과 가악에 대한 소양이 풍부해서 전장에서 분투하는 민족영웅을 그리는 노래도 많이 불렀으나 반도를 통일하고 당 문화를 수입한 후로는 이러한 사기적(士氣的)인 노래보다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정서로 전환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가요의 본질이 통삼전(統三前)의 것만 못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시대적 변천에 영향 되어 그 대상과 정서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 영용무쌍(英勇無雙)한 기백이 정서로 기우러져 오히려 향가문학과 같은 훌륭한 문학을 낳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작가중 국선의 도(徒)인 월명사나 충조사(忠詔師)의 작이 누구의 것보다 더 특출하고 훌륭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 먼저 월명사의 제망매가와 도솔가를 들어보기로 하자.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어
두려움 없지만
나는 간다고 말도 못하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나뭇잎처럼,
한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나 볼 날
나는 길을 닦아 기다리련다.
인간은 한번 나면 반드시 다시 죽지 않으면 안될 숙명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이 있는 즉, 남이 곧 죽음인 이치인 것이다. 흡사 원효 스님이 죽음의 고(苦)뿐만 아니라 남의 고도 함께 있다고 읊은 것처럼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월명 스님이 밑으로 꼭 하나 있었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사(弔辭)와 같은 시가다. 나이도 마치 좋은 어린 나이에 꽃도 한번 피어보지 못하고 애틋하게 죽어버린 누이 아마 <간다고 말도 못하고 가는> 너라고 한 것을 보면 어떤 갑작스러운 병에 갑작스럽게 죽어버린지도 모를 상황에서 더욱 허망하고 무상해서 월명 스님은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이 마치 꽃피고 좋은 아름다운 나이에 더욱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어버리니 그 낙담과 슬픔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의 피하지 못하는 길이기 때문에 스님은 이에 초연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무상이 가장 절실해지고 무상 속에서 훌륭한 발심이 나오기 때문에 이 죽음의 간절한 표현은 그것이 바로 무상설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월명사의 이 간절한 엘레지 속에서 종교에의 깊은 심연을 찾고 거기에서 다시 영생에의 더듬게 된다. 사랑스러웠던 남과 여의 하나의 혈육이 흡사 한 가지 위에 태어났다가 어느 가을날 이른 아침에 떨어져 어느 곳인지 행방조차 모르게 흩어져 사라져 간 나무 잎처럼 어디인지 모르는 타계의 사람이 되어 버렸을 때 그 깊은 고독과 무상감을 느낌과 동시에 승려인 월명사는 자연히 누이의 미타 정토에의 인도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에 대한 간절한 무상감과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지에 의한 구제의 힘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누이가 죽은지 49일이 되는 제일을 맞아 경건히 제단 앞에 앉아 누이의 영혼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에게 누이의 왕생 극락을 비는 장면이다. <아, 미타찰에서 만나기 위하여 내 도를 닦아 너를 기다리련다.>는 누이를 먼저 극락에 보내고 자기도 도를 닦아 미타찰에 가면 자연히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간절한 발원으로 누이의 천도(薦度)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월명사는 이 천도의 발원이 마쳤을 때 제단 앞에서 걸어 논 지전(紙錢)이 훌훌 날아 서쪽으로 갔다는 유사의 기록을 보면 이것은 곧 월명 스님의 지극한 정성과 법력에 의하여 누이는 완전히 천도되어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했음을 의미하게 된다.
실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천도제식에서도 혹 지전과 말(馬)을 그려놓고 제식이 끝난 뒤 위패(位牌)와 함께 불살라 버리는 것도 이러한데서 연유된 것이다. 월명 스님의 인간 됨과 종교적으로 승화된 입지를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실로 그는 스스로 국선의 도(徒)를 자칭한 승려인 화랑으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이요 종교인이었다.
교교한 달밤에 적(笛)을 불며 전대로(前大路)를 지나가니 창공의 달이 감동해서 가는 것을 멈췄다고 하는, 그로 인해서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는 기록을 보면 월명 스님이 얼마나 풍류에서 익혀진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제망매가는 향가 중에서도 가장 예술성이 짙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세 단계의 간명한 논리로써 성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생사의 무상함과 위약하고 부조리한 인생의 결말, 그리고 이의 해결과 구원(救援)을 위한 미타찰에의 승화로써 평범한 인간의 상황 속에서 우주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찬란의 물결이 타는 신라의 계절에 화랑들은 이처럼 인격과 재능의 정열을 발휘하여 자연과 인생의 예술에 심취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역시 월명사의 작인 도솔가를 보자.
오늘 이에 산화(散花)를 불러,
베푸신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命)을 받아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라.
이 노래는 경덕왕 때 하늘에 이변이 생겨 두 해가 나타났을 때 궁중에서는 승려를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이것이 없어진다는 일관(日官)의 말을 듣고 왕은 월명 스님을 불러 단을 차려놓고 이를 없애게 한 것이다. 월명 스님은 이때 그가 성범(聲梵)을 모르고 향가는 알기 때문에 향가로써 지어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오늘 왕관(王官) 제위(諸位)가 참석한 경건한 이 자리에 단을 차려놓고 꽃을 흩으며 경건히 바라오니 변괴된 해 너는 이 곧은 마음의 명(命)을 받아 미륵 좌주를 모시라고 하는 달램이 깃 들어 있는 노래이다. 즉 여기서는 곧은 마음의 명(命)를 받는다는 말이 중요한데 이 곧은 마음이란 오로지 성(誠)과 진실 된 직심(直心)의 경계로써 월명사의 일념(一念)된 진실의 마음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마음의 힘은 능히 변괴 된 해에게도 미쳐 사라지도록 하는 능력의 마음이었다.
이 지극한 마음의 전달로 인하여 이 노래를 부른 결과 변괴는 곧 사라져 없어져 왕은 기쁜 나머지 월명사에게 망(莽)과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었을 때 자화(慈化) 미륵존이 동자로 화하여 이를 받아 가지고 내원탑(內院塔)으로 들어갔다는 일화를 보면 월명사의 정성과)과 법력이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월명사의 법력에 의하여 해가 감동된 나머지 그 명에 의하여 변괴가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고 또 월명사의 진실 된 정성에 의하여 자화(慈化) 미륵존이 감응하여 이를 없앴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당시 화랑의 미륵사상도 엿볼 수 있고 또 당시 승려들의 밀교 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해석에 대하여 양주동(梁柱東)씨 김동욱(金東旭)씨 등의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으나 다른 논고(論考)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