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조와 선(禪)의 세계

2007-10-24     관리자

니체<Nietsche>의 저서「기쁜 배움」에 이러한 엉뚱한 문장이 있다.
『그대들은 저 광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어느 쾌청한 날 대낮에 초롱불을 밝혀 들고 장터 한복판에서 「신은 어데로 갔는가?」고 신을 찾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애당초부터 신을 믿지 않은 대중들은 「저런 미친 놈! 미처도 이만 저만 아니군!」하고 전후 좌우로 삥 둘러서서 조롱을 해댔다. 광인은 외친다.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그대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들이 그를 죽인 하수인이다.」그러나 우리가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도 대담하게 해치울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그 크나큰 바닷물을 들어 삼킬 수가 있었던가? 이 땅덩어리를 그 어떻게 태양의 인력 중심으로부터 잡아떼어 버렸을까? 지구는 이제 그 어데로 굴러 떨어져 나가고 있는가? 우리는 방향감각을 잃은 채 나락에로 숨막히는 전락을 겪고 있다. 이제까지 그처럼 우러러보던 그 신성성과 위대성을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이젠 우리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찍 이와 같은 위대한 행위가 있었던 적이 없다.』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물론 기독교의 신을 말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신은 역사적 세계 밖에 있는 영원한 존재로서 그는 그의 뜻대로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고 또 부절(不絶)히 섭리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신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고 존재의 질서는 오로지 섭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흡사 태양계에 소속된 모든 항성들이 태양의 인력에 의하여 그 위치가 유지되고 또 일정한 궤도를 도고 있는 것과 마치 한 가지이다. 그런데 지구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 지구를 태양의 인력 중심으로부터 잡아떼 내어서 허공 중에로 내어 던지듯이 우리(19세기의 인간)가 세계의 질서를 지배하는 신의 섭리로부터 이 세계를 절단해서 허공 중에로 내어 던진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인력권 외에 나서듯이 신의 섭리는 그 권한이 정리되고 신의 존엄성은 그 위엄을 상실하고 말았다. 인간의 심정엔 이젠 경건과 비포(毘怖)가 사라지고 텅 빈 허무가 아가리를 떡 벌린 체 있다. 공허! 신앙의 대상이 불식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신은 죽었다」는 어구의 의미이다.
이 혼돈(caos)은 그 무슨 형태로든가 다시 질서가 마련되어야겠고, 인간의 심정 속에 아가리를 벌린 이 공허의 장소는 그 무엇인가에 의해서 채워져야만 하겠다.
이 문장 중 『이젠 우리들 자신이 신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지 않겠는가?』라는 표현은 신을 살해한 이 엉뚱한 일을 저지른 인간 스스로가 신의 왕좌를 찬탈 할 것은 공공연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 위대한 행위는 결코 일찍 없었던 일이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된다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젠 세계의 질서와 섭리는 신의 뜻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성동물인 인간의 논리성에 의해서 계획되는 것이 되고 만다. 존재는 합리적인 것(이론에 들어맞는 곳)과 일치하고 세계는 논리적 구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사물들은 인간주권의 의식에 의해서 표상 된(의식되어진) 객체(대상,對象)이요 세계는 논리형식에 의해서 연결된 관련 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 한 것이 『칸트』의 비판(批判)철학이요, 헤겔의 변증법의 체계이다.
그러나 존재자신은 인간이 객관적 대상으로 표현하기 이전에, 또는 논리적 구조로 구성되기에 앞서 이미 스스로 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사물(존재 자―있는 것들)들을 그것으로서 나타나게 하는(현전 시키는)것은 무엇인가?
한 물체(사물­존재 자)가 현전 하기 위해서는 광선(빛) 또는 빛을 투사하는 거울이나 수면 같은 것이어야 한다. 형질을 가진 물체가 다른 물체를 나타나게 할 수는 없다. 예컨데 태양 광선 하에서 비로소 모든 물체가 그 자태를 나타낸다. 빛만이 이 물상들을 현전 시키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우리의 의식현상에 옮겨놓고 생각해보면, 형질을 가진 우리의 신체가 사물들을 비춰보지는 못한다. 또 지각하는 나―인식주관으로서의 나는 물론 나의 감각과 판단하는 기능을 통해서 외계의 사물들을 보고 알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지(知) 다만 개개의 사물(존재 자) 기껏 해서 사물의 총체(사물 상호간의 관계)를 붙여 볼 뿐이요 사물들을 단초 적(端初的)으로 비로소 나타나게 하지는 못한다. 사물들은 현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현전 시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지각하는 인식주관이 존재 자들을 바라보고 알기 이전에 이미 존재 자들이 현전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객대립(능소 대립)의 태도에서 사물을 보고 아는 표상작용(表象作用) 이외에, 이와는 달리 존재 자들은 단초 적으로 현전 시키는 또 하나의 다른 지(知)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사물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현전 시키는 빛으로서의 지(知)는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태양광선 하에서 물상들을 볼 때 우리는 매양 비춰진 물상들만을 볼 뿐 그것을 비추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어떤 다른 곳에 독자적으로 있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건만 물상의 형태만을 보는 데에만 집착하고 보면, 이와 함께 있는 비추는 빛은 비치지를 않는다. 이와 같이 사물(존재 자)을 현전 시키는 빛으로서의 지(知)도 또한 그러하다. 주객대립의 표상 적 태도(대상을 반연하는)에서 객체(사물)만을 대상적으로 의식하는 한, 현전 존재 자를 현전 시키는 현전성으로서의 빛인 지(知)는 현전 하지 않는다. 비춰진 물상에만 집념 할 때, 비치는 빛은 볼 수 없듯이 사물과의 일상적 교섭에만 골몰하는 한, 사물들을 그 자신으로서 현전 시키는 지(知)와 및 이 지(知)에 의하여 현전하는 진실한 세계(실상)는 가리워 진다. 그러므로 이 실상(존재의 진리)을 현전 시키는 지의 세계가 현전 하기 위해선 일절 대상의식을 가지지 않는 허심탄양(虛心坦懹)의 심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근데 인간은 자기의 표상작용에 의해서 생산되어진 관념적인 사고내용으로서의 객체를 유일 진실한 실재로 여기고, 역시 자기의 관심이후에 따라서 사물들을 유용함으로서 세계를 다른 가치체제로서 전환시키고 말았다. 자기의 생존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사물들과의 교섭에만 집념 한 나머지 이들 사물들이 거기서 현전하는 존재 현전의 장을 외면하고 말았다. 「존재 자와 존재 자를 현전 시키는 존재의 빛을 혼동하여 존재 자만이 행세를 하고, 존재 현전의 빛의 존재는 망각하고 있다.」고 『하이데까』는 근데 사조를 비판한다. 인간의 본질적 사유는 존재(현전의 빛)의 사유에 있는 고로 그 언젠가는 망각되어진 존재가 또 다시 회상될 날이 올 것이라고 암시적인 예고를 한다.
그는 본질적 사유존재가 저 스스로 현전하도록 방임하는(저 자신을 내어 맡기는)인간의 본질적 사유를 탈 목적 실존(EK­sistenz)이라고 규정한다. 탈 목적(EK­aus sich sein)이란 말의 뜻은 자아중심의 나(주제­능연지심)의 입장에서 일체를 가치형태(차별상)로 평가하는 태도 내지 주객대립의 태도를 일절 벗어버리고 허심탄양한 공허한 심경에서 존재 현전의 장을 마련하는 심성의 겸허(心盡情亡)를 말함이요, 실존이란 말의 뜻은 나 자신이 몸소 그것이 되어서 부단히 이 겸허­일체 대상의식을 가지지 않는 공허한 심정(Zichts)에 감내하면서 존재 현전에 상응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겸허한 이 심경은 진실한 존재가 현전하는 광장이요 또 인간이 존재 현전을 요해할 수 있는 존재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존재의 빛이기도 하다.
『하이데까』의 이 사상은 선의 세계에 접촉하는 한 절점(Tangenr)이 아니 되겠는가?
선의 세계는 주객대립의 이전에 이미 현전하는 본지풍광이요, 그리고 이 본지풍광은 이상과 같이 현실세계 밖에 장차 실현해야하는 과제로서의 세계가 아닌지라, 관년이 언어로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고로 이념적 설명은 금물이기는 하나 굳이 말하자면 『일념발심 돈무능소』라고 한다. 대경(對境)의 세계는 기실 인식주관의 의식내용에 불과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실재하는 양 믿고, 이것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이것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하는 전도망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생사업보이다. 그러나 그 미혹으로부터 깨어나고 보면, 어제 밤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과 같이 일체 만법이 모두 자성이 없는지라, 보는 나도 없고 보이는 지구도 또한 없다. 그러나 이 허심탄양의 공허한 나의 심경에서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무득자재의 세계, 즉 부처님의 지경계가 현전한다. 그러므로 『돈무능소...자각 자재본시불』― 공허한 심경(무념)이 바로 부처에게나 자기에게나 다를 것 없는 법신무작지(일체지)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심진정망지신자칭(心盡情亡智身自稱)』―주객대립의 태도만 버리고 나면 그곳이 곧 본연의 자능으로서의 불지경계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생사업진일체지해(生死業盡一切智海)』―의식내용을 실재로 여기는 전도망상이 업어진 공허한 심정에 존재자를 개명(차별지)하는 존재(일체지­근본지)가 현전한다. 그러므로 『여시자기여래광대지해(如是自己如來廣大智) 불이일체중생급자기십이우지연생행해중(不離一切衆生及自己十二右支緣生行海中)』라고 한다. 가치차별을 하는 근본으로서의 대상의식(객체적 세계에 사물들이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의식)만 갖지 않고 여전히 이대로 보고 듣고 이대로 살면, 생사업보의 이 현실적 세계가 바로 청정법신의 각(覺)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단 인인무념심체 불석연생 불유경기 허이영 적이조 실통만법, 수철십방 긍고긍금 무단무멸자 시야 (但 人人無念心體 不惜緣生 不由境起 虛而靈 寂而照 實通萬法, 秀徹十方 亘古亘今 無斷無滅者 是也)』라고 고려 진각국사는 갈파한다. 누구나 다 몸소 대상의식만 가지지 않고 보고 듣고 살으면 무념의 심경에 빛이 있다. 이 빛은 공간적 제한이나 시간적 생멸 없이 부단 불멸하고 부절(不絶)히 존재 사물들을 그에 적당한 모습으로 스스로 나타나게 하는 존재현전(만상여삼라지차일신상독로 (萬象與森羅只此一身常獨露)) 의 빛이다.
이 사상은 『하이데까』에서 전향만을 시도하고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