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 고구려 편-

한국불교사

2007-10-20     관리자
 

   일본 문화의 스승 담징(曇徵)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1년(日本推古18년·610) 3월에 담징스님은 도반 법정(法定)스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구려 고승이었던 담징스님은 법사였기 때문에 일본에다 불법(佛法)을 전하였던 것은 물론이지마는, 그는 불교 외에 유서(儒書)의 5경(五經)에도 매우 능하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문화적으로 미개하였던 일본에 기술과 예술을 가르쳐 주었다.

  담징스님은 일본에 가서 물감<彩色>과 종이와 먹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는 연자매와 맷돌<碾磑>을 만들어서 비로소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그 뿐 아니고 그는 도 당시 일본 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잘 몰랐으므로 그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日本書紀 券22, 元亨釋書 券16·20, 本朝高僧傳 券67 등>

  현재 일본에 전해져 있는 옛 기록에서 볼 수 있는 담징에 관한 것은 이것이 전부다. 함께 갔다는 법정스님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고, 담징스님에 관하여서도 매우 간략하게 보이고 있다. 그것도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의 경우에는 「和州元興寺沙門(百濟人)慧彌傳」에 붙여져 있어서 그 전기(傳記)를 따로 취급하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담징·법정)의 도일(渡日)에 관하여서도 한결같이 모두 고구려의 왕<嬰陽王>이 일본에 바친 것 <高麗王貢上僧曇徵法定>으로 기록하여 있다.

  그러면서 담징에 대하여 기껏「5경에 능하고, 채색과 지묵(紙墨)을 만들 줄 알며, 맷돌을 만들었다.」는 투의 인색하기 짝이 없는 서술을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심술궂은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담징이 위대한 불교문화인이었다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일본인들은 그가 5경이나 채색 지묵 등에 능하다고만 기록하고 있으나, 실은 그의 그러한 뛰어난 솜씨가 일본인들을 일깨웠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담징이 스님의 신분으로서 외전(外典)학문인 5경에 능하고 채색 지묵과 맷돌 등을 잘 만든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그 멀고 험한 바다를 건너서 일본에까지 갔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문화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된 일본이 그들의 미개하였던 전날을 감추기 위하여 그와 같은 필법(筆法)으로 사실을 왜곡되게 기록하였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고구려에서 담징스님을 바친 <貢上한> 것이 아니고, 앞서 혜자(慧慈)스님의 경우처럼 그들(일본)쪽에서 훌륭한 불교문화인을 고구려왕에게 요청하여 모셔갔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당시의 고구려왕이 먼 섬나라 일본에다 스님들을 바치겠으며, 어찌 법사인 담징인 외전의 5경에 능함과 채색 지묵 및 맷돌 만드는 솜씨나 자랑하러 갔겠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삼국시대의 스님들은 모든 면에서 세간의 스승이 되어야 했다. 정치면에서는 국왕이나 대신들을 지도할만한 식견과 덕행을 갖추어야 하고, 불법의 전파와 현실적인 활용을 위해서는 불교외적인 학문<儒·道 등>도 알아야 했으며, 또한 천문(天文)·지리·의술(醫術) 등에도 조예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섭정(攝政)이 되어 불교를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문화국을 이룩하고자 하는 초창기이므로, 정교(政敎)와 내전(內典, 즉 佛敎)의 스승으로서 혜자스님을 모셔갔고, 이어서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불교문화의 스승으로 담징스님을 초청해 갔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일본에 도착한 담징은 일본인의 일반적인 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불교는 물론 5경을 중심으로 한 속학(俗學)을 알려 주었으며, 물감과 종이와 붓과 먹 만들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또 그림 그리는 법까지도 가르쳤으며, 연자매와 맷돌을 만들어서 그 쓰임새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는 채색 및 지묵(菜色 及 紙墨)이라 하여 붓(筆)은 빠져 있으나, 실은 당연히 그 속에 들어가야 할 붓이 생략되어진 것 같이 보인다. 물감과 먹과 종이를 만들어서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거기에 반드시 붓이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정들을 미루어서 우리는 담징스님이 일본에 건너가서, 먼저 세속적인 학문을 가르쳐서 지적문화(知的文化)를 일깨워<啓導해>주고, 다름에 채색과 지필묵 만들고 쓰는 방법과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서 정서적 생활문화를 향상시켰으며, 또 다시 연자매와 맷돌 같은 것을 만들어 쓰게 함으로서 식생활을 개선케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담징스님은 고구려 불교인으로서 일본의 불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에 걸쳐서 이끌어 주고 가르친 스승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여기에 덧붙일 것은 일본 내량(奈良)의 법륭사(法隆寺) 금당(金堂)벽화 문제이다. 그 벽화를 담징스님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바가 있으나 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 화법(畵法)이나 시대로 봐서 그림에 능하였다는 고구려의 담징이나 그 계통의 화사(畵師)가 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입증할만한 근거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일본 삼론종조(三論宗祖) 혜관(惠灌)

  혜관법사가 고구려 스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언제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고 출가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는 일찍이 중국<隋>으로 들어가 당시 중국의 대 학승이며 삼론학(三論學)의 집대성자(集大成者)인 가상대사 길장(嘉祥大師 吉藏, 549~623)에게서 삼론을 공부하였다. 거기서 삼론학의 깊이를 모두 통달한 그는 고구려로 돌아와 삼론을 강의하였던 듯 하다.

  국내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아마 그의 삼론강학(三論講學)이 당시의 나라 안은 물론 해외에 까지도 떨칠 만큼 그 명성이 자자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그 명성을 듣고 일본 불교학의 진흥을 위하여 모셔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물론 일본 쪽의 기록에는 담징스님의 경우처럼 역시 고구려왕<營留王>이 일본에 바친 것<高麗王貢僧惠灌>으로 되어 있다.

  혜관법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영류왕 8년(推古 33년, 625) 정월의 일이었다. 그는 일본 국왕의 배려로 당시 일본 불교의 중심도량<道場>인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면서 대승교학을 크게 펼쳤다.

  그 해 여름에 일본 전역에는 심한 가뭄이 들었다. 농작물을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먹을 물까지도 다 말라 버릴 지경이었다. 애간 탄 일본 국왕<天皇>은 혜관스님의 법력(法力)을 간청하였다.

  불교의 참뜻은 중생구제의 자비(慈悲)에 있으므로 혜관법사는 그들 창생을 위하여 비를 비는 <祈雨>자리에 나섰다. 그는 푸른 장삼 <靑衣>을 입고 법상에 앉아 삼론(三論, 中論·百論·十二門論)을 강의하였다. 법사가 삼론을 강의하는 동안에 비는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 비를 줄기차게 내려 일본 전 지역을 흠뻑 적셨다.

  온 나라 안이 심한 가뭄으로부터 해갈되자 일본왕은 매우 기뻐하여 혜관법사를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일본이 성덕태자의 섭정을 계기로 하여 불교가 상당히 흥하기는 하였으나 통제체재(統制體裁)의 교단(敎團)이 이룩된 것은 624년(推古 32년)의 일이었으니 바로 혜관이 도일한 그 전 해였었다. 그 때 일본 불교계의 지도적 원로였던 백제의 관륵(觀勒)법사가 건의하여 승정제도(僧正制度)가 비로소 성립되었고, 그 초대 승정에 관륵스님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관륵스님이 승정으로 된지는 불과 1년밖에 안되었으나 그는 이미 연로하여 초창기의 교단을 통제하기가 벅찼으므로 혜관스님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같이도 보인다.

  제 2대의 승정이 되어 일본 불교계를 총관하면서 그는 계속 원흥사에서 삼론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화주 선림사(和州 禪林寺)가 완성되었을 때 그는 낙경도사(落慶導師)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하내 지기고을<河內志紀郡>에 정상사(井上寺)를 세우고 거기에서 삼론의 교학을 널리 펴다가, 아흔살<九旬>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옛 기록에는 빠져 있으나 혜관법사는 상주 록도 신숙근 본사(常州鹿嶋信宿根本寺)의 개산조(開山祖)로도 전해지고 있다.

  혜관법사는 그와 같이 원흥사와 정상사를 중심으로 하여 삼론학을 강의하여 그 학풍을 크게 떨쳤으므로, 일본 삼론종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삼론종을 크게 떨친 뛰어난 제자로는 복량(福亮)과 지장(智藏)을 들 수가 있다.

  복량법사는 본래 오나라<誤國> 사람으로 일본에 왔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혜관법사가 도일하여 삼론을 강의할 때에 그 문하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 스승의 뒤를 이어 원흥사에서 삼론종을 크게 천양하였으며, 승정(僧正)의 지위에까지 올랐었다.

  지장법사는 바로 복량승정의 출가 이 전에 낳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출가한 지장은 어린 나이에 원흥사로 가서 혜관법사의 삼론 강의를 들었다. 그로부터 삼론을 연구한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더욱 학문을 넓히고 돌아와서 학인들을 가르치며 삼론학을 펼쳤는데 그도 승정이 되었다.

  원흥사에는 혜관을 포함하여 9명의 승정<九僧正>이 배출되었는데 모두가 삼론종의 학승들이었다고 한다.<日本書紀 券22, 三國佛法傳通緣起  券中, 元亨釋書 券1, 本朝高僧傳 券1, 三論祖師傳集 券下 등>

  이상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혜관법사가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학을 크게 펼침으로써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러나 혜관법사가 일본에 건너간 우리 스님들 중에서 삼론학자로서는 최초의 고승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도일하여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혜자스님도 삼론에 능하였고, 혜관보다 앞서 승정이 되었던 백제의 관륵법사도 역시 삼론의 대가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혜관법사보다 먼저 일본에 가서 삼론의 가르침을 전하기는 하였으나, 모두 교학중의 일부분으로서 알렸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혜관법사는 삼론을 본격적으로 강의하여 삼론학을 천향하므로써,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어 그 계통이 확립되기에 이르렀었다. 그래서 하나의 학종(學宗)구실을 하게 되어 오늘날 종파불교라고 일컫는 일본불교에 있어서, 그 종파 형성의 맨 첫 자리를 자치하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