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누구신가?

법회강단[1]

2007-10-19     관리자

     [1] 미국의 불교인들

   지금 미국에서는 불교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30여 년 전에 10여 년 동안 급격히 불교인구가 증가한 때가 있었다. 한 때의 붐인데 이젠 식었어도 불교인의 수는 확실히 상향선을 걷고 있다. 예를 든다면 국민학교나 중학생이「니르바나」라든지「깨달음」이라는 낱말을 알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상향곡선이 치솟아 올라가지는 않지만 저변으로 퍼지는 것은 이삼십년 전보다 현저하게 착실하다. 그래서 불교는 미국 땅에서 점차 뿌리 내리고 있다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지금 미국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이 300여 명 가량 된다. 우리나라는 아마 100명도 안 될 것이다. 미국은 땅도 넓고 대학 수도 많고 역사학과가 있으면 으레 동양사를 가르치고 동양사를 가르치면 중국, 일본, 한국을 가르치고, 그러자면 불교를 가르쳐야 되니까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불교하는 사람은 그보다는 적을 줄 안다.
   이렇게 불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고 가르치는 사람이 불어나고 있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중 제일 문제되는 것은 불교가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하는 말로 반야심경의「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텅 빈 것이 그대로 가득 찬 것이고 가득 찬 것이 그대로 텅 빈 것이다. 보이는 물질이 안 보이는 공(空)도리이고, 안 보이는 공도리가 보이는 물질현상세계이다.』는 이런 말을 제일 어려워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것 같으면서 모른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은 알다시피 기독교를 많이 믿는다. 물론 유태교 회교도도 있다. 모두 유일신을 믿는 그런 전통에서 자라나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세계는 악의 세계이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기 어려운 괴로운 사바세계가 바로 극락세계라 말한다. 앞서「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어리둥절했는데 아제 다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라고 하니 어렵다고 한다. 이런 것 외에 다른 어려움도 많다.
   기독교인들은『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다.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도저히 신과 자리를 함께 앉을 수 없다. 거룩한 그분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져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과 인간을 혼동하는 것은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 한다. 그런데 불교인은 말하기를『일체 중생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불생불멸 하시는 분이며, 영원히 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분,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분이다.』이런 말로 부처님을 표현한다.
   또 불교경전을 보면 신을 수식하는 말들이 모두 부처님을 수식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을 신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이 딴 사람이 아니라『거리를 다니는 모든 사람이다.』『모든 사람이 완전한 부처님이다.』이렇게 말하니 또 한 번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불교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지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기독교적, 서양적 사고방식에서는 수도라고 하면 항상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경전에 보면『나쁜 생각을 버리려 하지 말고, 좋은 생각을 찾으려고도 않는다.』고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 쓰여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저들은 알아들을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는 미국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점이 희망이 있다. 그런데 의외에도 동양인은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이 동양인의 비극인 것 같다. 우리가 다시 반성해봐야 할 대목은 이 대목이다. 저들이 말하는『어제 들을 때는 알 것 같았는데 아침에 생각하니 또 모르겠다.』는 식으로 모르면 모른다고 분명히 하는 점이다. 또 수도를 할 때 번뇌를 없애고 보리를 구한다는 태도를 취하는데 경전이나 스님들 설법에서는『번뇌 망상이 그대로 보리다.』라고 합니다. 번뇌가 바로 부처님 지혜이지 번뇌를 떠나 부처님 지혜가 따로 없다고 하니 어렵다.
   이러한 불교사상과 기독교사상,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를 학술적으로 표현하자면 동양사상은 불이론(不二論)적인 데 비해서 서양사상은 이원론(二元論)적으로 본다고 하겠다. 천국과 지옥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과 중생이 둘이 아니다. 공(空) · 색(色)이 둘이 아니다. 사바와 극락이 둘이 아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불교는 말한다. 그러니까 동양 쪽에서는 이원론을 배격하고 불이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데에 비해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분명히 둘로 나누어야 하고 이렇게 혼돈해서는 안 되며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은 다르고 그러니까 좋은 생각은 환영하며 나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런 태도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동양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2] 무엇을 믿는가

   그런데 오늘날 미국생활의 이런 여러 문제점을 보고 있다가 동양 특히 한국에 와서 보니 미국의 문제점을 그대로 유산상속이나 한 듯 전부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들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문제를 풀려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지만 그동안 만나고 겪은 결과 그런 느낌을 더한다. 불교를 믿는데 있어서 그런 경향이 퍽 많다. 미국에 있는 불교인들이 또한 그렇다. 그래서「불교인들은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을 중점으로 말해 보겠다.
   기독교인들에게『당신을 무엇을 믿소?』질문하면『하나님을 믿소. 예수님을 믿소.』말한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우리의 죗값으로 십자가를 졌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인 보고『당신은 무엇을 믿소?』물으면 답변을 안 하는 것이 보통이다. 답변 안하는 이면에는 답변할 수 없어서 안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나는 부처님을 믿소.』하고 대답하고『부처님은 누구요?』하고 물으면 생각이 엇갈린다. 때로는 순간 법당의 불상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불상을 믿는다.』라는 말은 어떤 경전에도 없다. 부처님을 믿으라 했지 불상을 믿으라는 말은 없다. 어떤 분은『부처님을 보았다.』하기에 물으니 꿈에 만나 보았다고 한다. 해인사 법당 부처님을 꿈에 보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결국 불상의 연장이다.
   어느 정도 불경도 읽고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인인 경우 부처님을 설명하라 하면 교리를 들고 나온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말은 부처님이 가르치는 진리를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서 사제법문이 어떻고, 공사상 연기설이 어떻고, 여러 가지 교리를 갔다댄다. 교리 속에 담겨진 부처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는다는 말이 교리를 믿는 것과 같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리는 불교신도들의 믿음을 분명하게 해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리가 신앙이라고는 어떤 경전에도 말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처님을 믿는다는 말은 불법승 삼보를 믿는다는 뜻도 있다. 법보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상징하듯이 언뜻 교리인 것처럼 들리지만 법보라는 말은 승보 불보 속에 함께 담겨 있는 다분히 삼위일체적인 종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보 승보 법보를 따로 놓고 그 진리를 믿는다 하는 이러한 뜻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지칭하는 이론일지라도 교리가 신앙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무엇을 믿소?』하고 물음을 당했을 때『부처님을 믿소.』하고 고백해 놓고도 결국 불상도 아니고 교리를 갔다가 댄다고 하면 서양사람이나 동양사람의 과학적 이성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과연 그렇소 하고 믿을 마음이 날 것인가? 내가 지성인으로 더 나은 지성인 되기 위하여 사제법문도 공도리도 알려고 할 수는 있어도 내가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서도 그것을 갖겠다는 그런 믿음이 나오겠는가. 나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에 몇 번 나왔다가도 안 나와 버리고 불교를 믿는다고 말하고 다닌 지가 얼마 안 되어서 퇴색하든지…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생각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교 교리를 좀 공부하고 나서 교리를 아는 것을 가지고『나는 불교를 믿는다.』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된다.
   또 큰스님을 믿는다는 것도 있다. 불교 공부를 할 때 큰스님 친견한다는 것은 수행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큰스님 친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신앙의 깊이와 방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 불교에는 큰스님 믿는 것을 부처님 믿는 것으로 대치하는 분위기가 전통 속에 오래 흐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큰스님이 해인사나 불광사 어느 방에만 계시고 거기서만 뵈올 수 있다면 수만 리 떨어져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뵈올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결국 큰스님 믿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로되 어떤 지역에만 계시는 분으로 생각되는 큰 스님은 믿음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가 많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한테 빛을 주셔서 길을 알려 주시고, 내가 힘이 없을 때 힘을 주시며, 내가 괴로워 할 때 괴로움을 없이하여 주시는 그런 부처님이다. 이런 부처님이기에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부처님이 해인사 법당에만 계시다면 어떻게 나에게 빛을 주고 힘을 주고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힘이 될 수 있겠는가. 믿음이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한 것 이라면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부처님은 누구신가? 다시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어느 경전이나 조사스님 어록이나 현대 선지식의 법어록에 이르기 까지 똑같은 말로 분명히 일러 주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부처님을 보고 싶거든 일체 중생이 부처님인 것을 보라는 것이다.『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길거리에 나가면 사람이 많다. 보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도 있는 것이 길거리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그 말씀, 이것이 바로 부처님은 누구라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3] 모든 사람이 부처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면 나도 당신도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없다.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앉아 있어도 부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항상 뵙고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처님을 책에서 찾고 불상에서 찾고 큰스님에게서 찾고 밖에서만 간절하게 찾았다.
   이런 말은 너무나 기초적인 말이기에 불자라면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나도 불교 믿기 시작한 후 30년 동안 이 말을 들었다. 결국 불교가 잘되고 못되는 갈림길은 30년 동안 귀가 아프게 들은 그 말 한마디를 다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을 소홀히 할 때 불교는 망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수행하고 생활할 때 불교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말은 내가 스스로 부처님답게 행동한다는 말이고 설사 다른 사람이 실수를 했다 해도 그 사람이 일시적 착각 때문에 실수 했을 뿐 사람의 본바탕은 부처님이고 실수한 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믿음에서 그 사람의 실수를 탓하기 보다는 존경하고 받들고 보살피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라도 그를 보살피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모든 사람 부처라는 말은 바로 이 말인 것이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말인데 요즘 서양에서 불의와 대항하기 위하여 인도주의를 외치지만 그런 서양의 휴머니즘 정도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종교적 인도주의 모든 사람을 절대자로 받드는 절대적인 인도주의가 불교의 믿음의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믿음도 윤리도 수행도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말 한마디에 귀결되는 것이다.<계속>
-------------------------------------------------------------------------------
이 글은 6월 30일 불광법회에서 발표한 강연 요지이다.(문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