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東鶴寺)

고사(古寺)의 향기

2007-10-16     관리자

     [1] 계룡산

   대전에서 서쪽으로 약 20km, 탄탄한 아스팔트길을 40분쯤 달리면 계룡산 동쪽 입구가 된다. 바로 동학사의 입구다. 예부터 북으로 백두산, 남에는 지리산, 동에는 금강산, 서에는 묘향산이라 하고 중앙에 계룡산을 꼽았다. 계룡산은 신라 때부터 내려온 5악(五岳)가운데 중악(中岳)이다. 계룡산은 해발 840m인 상봉에서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과 같다고 하여 계룡산이라 불리어 온다. 만산이 꽃으로 덮인 봄의 계룡산, 향기로운 녹음 속을 천고를 소리치며 흐르는 여름의 계곡과, 온 산이 붉게 불붙은 가을 계룡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방문화 조사기에 의하면 이 산에는 6백여 종의 식물, 150여종의 조류가 깃들이고 있다고 하니 과연 명산의 면모가 아직도 넉넉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룡산은 신흥 유사종교와 관련된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은 정감록 탓인지도 모른다. 계룡산에는 서쪽 산록에 갑사(甲寺)가 자리하고 남쪽 기슭에는 신원사(新元寺)가 그리고 동학사는 계룡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말하자면 계룡사는 삼사가 웅거한 주산이다.

     [2] 오뉘탑 설화

   동학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정립했던 시대인 신라 성덕왕 23년(서기 724년)이라 하는 것이 동학사에 전하는 기록이다. 동학사 창건에 깊은 연유가 있는 오뉘탑(남매탑)의 조성 형식으로 보아도 그 연대가 그 이하로 내려오지는 않을 것 같다.
   동학사의 창건에는 한 견고한 수행인의 수행설화가 등장한다. 오늘의 동학사에서 계룡산을 오르는 뒤쪽 길을 약 2km 오르면 한 쌍의 웅장한 탑을 만난다. 하나는 5층, 하나는 7층이다.
   이 탑이 동학사의 창건을 말해 주는 오뉘탑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에서 구법한 상원(上願) 대사가 입국하여 지금의 탑 자리에 한 칸 토굴을 묻고 힘써 수행하였다. 어느 날 큰 호랑이가 나타나 문전에 꿇어 앉아 자주 입을 벌리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을 호소하는 듯 보였다. 상원 대사는 필시 호랑이 입안에 무엇이 박힌 것이 아니가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범의 목에 가시 같은 뼈가 박혀 있었다. 대사는 호랑이 입에 손을 넣어 쉽게 가시를 뽑아내 버렸다. 호랑이는 크게 만족한 듯 일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대사가 밖에 나와 보니 산돼지 한 마리를 호랑이가 물어다 놓았다. 아마도 그것을 공양하라는 뜻인 듯싶었다. 호랑이와는 이미 벗이 된 대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고 멧돼지를 돌려보냈다. 호랑이는 알았다는 듯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이고 날이 지났다. 겨울은 깊어 가고 자고 나면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어느 날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한 여인이 문 앞에 엎드러져 있고 호랑이도 곁에 있었다. 호랑이가 여인을 업어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대사는 놀래어 여인을 방안으로 옮기고 구완을 했다. 얼마 지나니 여인은 소생했다. 기절했을 뿐 몸에 다친 데는 없었다. 여인의 집은 경상북도 상주였다. 초저녁에 뜰 앞에 잠시 나왔다가 별안간 범이 들어 닥친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혔으므로 수일 후에야 상주 본가로 데려다 주었다. 여인의 부모는 딸의 은인이라 하여 대사를 받들고, 여인 또한 세속에 뜻이 없어 출가수도를 원하니 부모 역시 허락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이래서 상원 대사의 토굴은 상원암이 되고 그 문하에 많은 스님들이 있게 되었다. 대사와 여인은 대도를 성취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였는데 두 사람의 사리를 거두어 대사의 상족되는 혜의(懷義) 대사가 탑을 세우니 오늘의 오뉘탑이라고 한다. 때는 신라 성덕왕 23년이니 동학사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위 오뉘탑 설화가 얼마나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한 수행인의 사리탑으로 보기에는 수긍이 가지 않고, 다만 긴 동학사의 역사를 알 뿐이다.

     [3] 기나긴 역사

   오늘의 동학사가 지나온 자취를 돌이켜 본다.
1) 창건은 앞서의 설화에 본 바, 신라 성덕왕 23년(723년) 혜의 대사이고,
2) 고려 태조3년(920년) 도선 국사가 태조의 원당으로 중건 하였고,
3) 태조20년(937년) 신라 유신 류차달(柳車達)이 신라 시조의 박제상(朴提上)을 제사했다.
4) 조선 태조3년(1394년) 길재(吉再)가 고려 유신 정몽주 등 삼은(三隱)을 이곳에 봉안하고 삼은각(三隱閣)이라 했다.
5) 조선 영조4년 (1728년) 병난으로 전소하였고,
6) 조선 순조14년(1814년) 금봉(錦峰) 대사가 전 가람을 중창, 사명을 동학사(東鶴寺)라 고쳤다.(그때까지는 東學寺)
7) 조선 고종 원년(1864년) 만화(萬化) 화상이 중수하고,
8) 오늘의 동학사는 종전의 가람을 크게 개수하여 오늘의 대강원 시설을 이룩하였다.

     [4] 동학사의 특징

   동학사는 근세에 수많은 불교학자를 배출하여 한국불교를 지탱해 온 유수의 강원 사찰이었다. 이 전통은 1950년대에 있었던 정화 과정에서도 계승되어 오늘의 비구니 강원으로 이어 온다. 오늘날 동학사 강원에는 불교강원 교학 전 과목을 가르치고, 수학하는 스님들이 항상1백 명이 넘는다. 전통을 이어 오늘의 역사를 살찌우며 미래로 뻗어 나갈 큰 진리의 물줄기는 오늘도 이곳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다.
   동학사에서 특히 느끼는 것은 수행을 위주한 교학사찰이라는 것 외에 예부터 유불(儒佛)이 공존하는 역사를 가진 점이다. 우선 삼은각(三隱閣)의 존재가 그렇다. 여기에는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의 삼은 등 6위의 유사(儒士)를 향배하고 있다. 그리고 숙모전(肅慕殿)에는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死六臣)과 단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단종에게 의열을 바쳤던 충절 89를 향사하고 있다. 이것은 동학사가 조선조에 의기에 찬 유사들의 의지처가 되고 왕실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여 사찰에 산과 전답을 내린 사실이 전해온다. 유사들이 불법에 의지하여 원혼을 천도한 것이다. 동학사는 긴 역사 속에서 그늘진 중생, 뜻을 펴지 못한 의로운 선비들이 마음을 기탁하고 꿈을 가꾸어 갔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