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어머니

이남덕 칼럼

2007-10-15     관리자

새벽3시. 서편 하늘에는 열엿새 휘황한 달빛이 내리고 있고, 남쪽으론 오리온성좌가 기울고 있다. 북두칠성은 죽엽산 잣나무 숲에 가리어 보이지 않지만 천지운행이 여여히 순조롭게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한가위 달밤이다.
올가을 한가위는 예년에 없이 특별했다. 우선 닷새 동안이나 연휴가 계속되는 바람에 외지에 나가 있던 자손들이 마음 느긋이 고향을 찾아와 소음과 분망에 찌들은 도시의 고달픔을 말끔히 씻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을 것이다. 고향에는 재생(再生)능력이 있다. 더욱이 깊어가는 가을에는 여름 동안의 모든 상처를 다스려주는 그런 자연의 치유력이 있는 듯싶다. 참 올 여름은 참담하고 극심한 여름이었다.
을축(乙丑)년 물난리보다도 더한 물난리를 치루었다. 그 탁류 속에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논밭전지며 가재도구와 가축까지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그들의 상처는 언제 가실 날이 있을지.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 한가위 달빛은 부드럽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보상이나 해 줄 것처럼 어루만져 줄 것이다.
추석 명절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으로 지켜졌는지 확실한 기록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농경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증거로 차례상을 둘러보면, 여느때 제상과 다름없는 과일을 진설하지만, 밤ㆍ대추ㆍ사과ㆍ배ㆍ감 모두가 got실과를 놓을 수 있는 추석차례상이다. 그리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어놓는다. 오곡백과 무르익는 한가위 차례상은 생각할수록 조상에 대한 감사, 천지신명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진설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옛기록 위서동이전(魏書東夷全)에 나타나는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以 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日東盟)이나, 예(濊)의 무천[舞天,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과도 같이, 농경문화의 추수감사(秋收感謝)의 뜻이 담긴 명절이 추석이고, 그 차례상은 유교적 제례를 거친 결과일 뿐, 감사의 대상은 조상뿐 아니라 그 근원에는 제천(祭天)의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 조상의 매 꼭대기가 단군(檀君)할아버지니 그분은 또 환인(桓因)-환웅(桓雄)의 하늘을 잇는 분으로 조상이 곧 하늘에 귀착된다. 공교롭게도 금년에는 추석절과 개천절(開天節)이 한날이어서 더욱이 그 사실을 실감하였으니 그 점에서도 특별했다. 게다가 남의 나라 개천절날 서독과 동독은 통일독일기념일을 만들었으니 만감의 박수로 축하해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추석은 이렇게 조상과 천지 대자연에 감사하는 명절일 뿐 아니라, 이웃끼리 흐뭇한 정을 나누고 반가운 사람들끼리 만나는 명절이다. 요즘은 외국에 떠나 있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들이 많다. 달빛 아래 서성이며 멀리 떠나 있어서 못 돌아오는 자식들을 생각한다. 또 북녘땅을 바라보며 조상의 성묘조차 된다 된다 하던 금년마저도 못하게 된 자손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한다. 추석이면 ‘민족 대이동’을 할 만큼 고향을 찾는 자손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일년 열두달 더도 덜도 말고 그저 팔월 한 가위날 만큼만 되었으면’하는 덕담도 있지만 사람들 마음부터 넉넉해져서 서로 나누는 기쁨을 갖게 되니 날로 각박해지는 세태 속에서 얼마나 다행한가.
그러나 한편 이렇게 추석예찬만 늘어놓을 만큼 농촌사정이 한가한 것은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천신만고로 일손을 얻는다해도 품값이 비싸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지난해 시험삼아 산다래기논 서마지기 농사를 지어보았다. 금년에는 짓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지타산이 안맞는 것은 제쳐 놓고라도 말구리 마을에 이제는 소 먹이는 집이 한 집도 없어서 논을 갈 수 없고 경운기로 갈아야 할 텐데 산골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 소를 안키우느냐, 이제는 농촌도 기계영농 아니면 수지가 안맞기 때문이다. 기계도 경운기 정도가 아니라 트랙터로 몇천, 몇만평쯤 기업영농 아니면 외국산 곡가를 따를 수가 없다. 산다래기 논이 문제가 아니라 평지의 논들도 묵히는 땅이 허다하다. 게다가 공장용지다, 무슨 부지다 하고 부동산투기로 땅값이 오르는 통에 멀쩡한 옥답에 쓰레기ㆍ흙을 부어 잡종지로 용도변경해서 팔아먹는다고 한다. 농촌은 완전히 황폐일로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유가 너무나 명백하다. 고향을 지키는 것은 노인들뿐이다. 앞뒷집 돌아봐도 다 50대 넘은 노인들뿐이다. 이 노인들마저 사라지면 농촌은 누가 살 것인가.
금년 말에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라는 것이 타결된다고들 한다. 우리 농산물 값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외국산 농산물이 수입되면 농촌이 받을 타격은 상상하기조차 무섭다.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화의 거센 파도를 막을 수가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농촌이 받는 피해를 극소화시킬 방안이라도 완벽하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것 아닌가. 한강물 뚝이 무너져서 그 참담한 피해를 목격하지 않았는가. 꼭 그 꼴이다.
농촌을 따로 떼어내어서 남의 일처럼 보는 그 발상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농촌은 바로 우리의 출신지인 민족의 고향이다. 사지(四肢) 몸덩이로 치면 민족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심장 그곳이다. 그 증거로 추석이나 정초 같은 명절이면 열일 다 제쳐놓고 고향산천을 찾지 않는가. 만일 우리에게 명절이나마 찾아갈 고향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들의 삶이 찌들고 고달프게 느껴질 것인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면서도 두고 온 고향산천, 살아계신 부모님이나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통문화의 향기로운 추억이 있기에 우리는 숨통을 열고 고된 작업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가 건전하게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건전한 농촌의 뒷받침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농경문화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쓰잘 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이다. 오히려 산업사회에서 더 기계화 일로로 발달되는 사회일수록 농경문화의 중요성은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농산물 재배를 일체 흙에서 하지 않고 인간의 식품조차 모든 것을 기계로만 생산해 내는 사회를 가정해보라. 그들의 인간관, 그들의 인생관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가공할 것으로 변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정도의 산업사회에서도 비인간화의 폐단이 날로 극심해져 가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지 않는가.
농촌의 존재 의미는 우리들의 ‘고향’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건전한 인간관, 행복한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식물을 가꾸고 동물을 키우는데서 생명존중의 고귀한 품성이 길리워지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가르침도 이 원리에서 털끝만큼도 다른 것이 아니다. 우주의 실상, 바로 생명 그 자체가 부처님이시기 때문이다.
달은 서편에 기울 줄도 모르고 새벽잠 없는 늙은이와 벗하며 맑게 빛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만 애잔하다.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에게는 어머니의 고향이다. 고향과 어머니, 그래 나는 고향 같은 어머니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고향을 지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