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불연 맺어주는 것이 곧 애국이지요.“

인물탐방/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 연합회 회장 조정관 스님

2007-10-15     관리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富)를 좇을까, 아니면 학문을, 그도 저도 아니면 명예와 권력을 위하여 온 정열을 쏟아볼까나…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변하는 마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흔들리는 마음이나마 나름대로 잘 살기 위해 분망한 것이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 아니겠는가.’
한세상 사는 일, 참으로 잘 살아내야 할텐데 시종 갈팡질팡하기 십상인 것이 또한 가치 있는 삶 찾기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사회의 거울과도 같은 분들이 많다. ‘아, 바로 저것이구나. 저분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면서 그 맑고 깨끗한 인간의 향기에 이끌려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찬탄의 말을 하염없이 쏟아낼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기자는 부처님 빛 받아 살아온 덕택으로 부산에서 그런 분을 만났다. 바로 조정관 큰스님이다. 부산시 남구 망미동 950번지 배미산 중턱에 그림처럼 자리한 영주암에서 주석하시면서 부산불교 대중화에 주도적 역할을 해오고 있는 정관스님.
남다른 포교 원력으로 종단에서조차 구성할 수 없었던, 어린이지도자연합회를 조직하여 10여 년간 힘 있게 이끌어오고 있는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린이 포교의 더함없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불가(佛家)에는 어린이 지도를 위한 포교 연구지도, 지도자들끼리의 모임도 이렇다할게 없는 실정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난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는 분명 이 나라 어린이 포교의 금자탑이다.
산간벽지에서 본연합회에서 발행하는 동련지(교사용)와 연꽃지(어린이용)를 받아들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는 어느 어린이 법회지도교사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기자는 이에 대한 것부터 여쭈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부산의 어린이포교에 관심을 가진 스님과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연합회를 구성하자는 얘기가 나왔지요. 당시에 나는 어린이법회, 중고등학생법회를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바빴어요. 회장자릴 사양하다가 하도 권하길래 맡게 되었는데 벌써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10개 지부를 발족해서 시작했는데 10년이 지나는 동안 80여 지부가 되었지요. 부산에서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가고 어린이 포교의 방향이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설정되면서부터 전국적으로 결성하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86년도에 창립법회를 가졌는데 아주 호응이 좋았어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300여 지부가 결성되었지요 1년에 두 차례 동계와 하계 수련대회를 가지는데 전국 곳곳에서 옵니다. 올해는 800명이 넘게 와서 어린이 포교에 대한 드높은 의지를 불태웠지요. 울릉도나 진도 등 여타 벽지에서 온 지도교사를 보면 그저 반갑고 대견하기 그지없어요. 보람도 갖게 되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 일만은 끊이지 않고 잘 해내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번하게 됩니다.
스님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본 연합회가 십년을 한결같이,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들으며 굴러올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정관 스님의 덕화(德化)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제각기 생업에 임하면서 남은 시간은 온통 어린이포교에 바치는 불자, 그들은 언제라도 바쁘다는 말 한마디로 이 힘든 일을 박찰 수 있는 위치에 있건만 여태까지 한명도 그런 불자가 없었으며, 나날이 본 연합회가 발전해 가는 것은 부처님의 화합의 힘이요, 정관 스님의 철저한 수행력 덕분이란다.
정관 스님은 경주에서 태어나서 1955년 부산 범어사에 입산하여 동산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전생인연인지 아주 어릴 때부터 풍경, 목탁, 법고 등 깨달음의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스님들의 누더기 속에는 뭔가 다른 차원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고, 이광수 소설 「원효스님」을 독파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출가하게 되었다며 빙그레 웃으신다.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자신이 선택한 수행자의 길, 계를 받고 후회 없는 길이 되고자 스스로 이름을 정관(正觀)이라 지었다.
“계를 받고 이름을 지어주시는데 우리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속명(俗名)이 중환이라. 경주서 왔으니까 경환이라 해라.’하시는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내가 이 길을 잘 갈 수 있을까. 잘못해서 속(俗)도 아니고 승(僧)도 아닌 꼴이 되면 어쩔까?’하는 걱정 속에 잠겨 있는데 퍼뜩 정관이라는 두 글자가 생각났지요. 그것도 칙간에서(웃음) 당시에 8정도가 있는지도 모를 때였어요. 이름부터 정관이라 지어 놓고 나서 바로 보고만 살면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일더군요. 그 후로 우리 스님한테 이름 때문에 ‘저사람 자칭 정관이라, 그게 정관이냐’라고 쿠사리를 맞기도 했지요”
정관 스님은 출가한 이후로 지금까지 청정한 계행과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해 오고 있어 젊은 납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스님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모신 다음 바로 기도정진에 들어간다. 공양시간전인 오전 8시까지 기도정진은 계속된다. 공양 들고 한 시간 가량 쉬고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여러 가지 집무를 본다. 찾아오는 신도들을 반가이 맞아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저녁 6시에는 15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써오고 있는 불(佛)자를 쓴다. 일생의 일과로 정한 하루에 열장 씩 쓰는 불자는 이미 8만여 장을 썼다. 만장이 될 때까지는 다 소각시켰고 그 뒤부터 쓴 것 중에서 2만 5천여 장은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저녁예불을 모신 다음 3시간에 걸쳐 예외없이 기도정진에 들어간다. 스님의 하루 수면시간은 고작 네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하루 예닐곱 시간의 기도정진력은 ‘기도영험이 크신 스님’으로 인구에 회자되게 했다. 여타의 선승(禪僧)들과는 달라 보이는 독특한 정관 스님의 기도수행법에 대해 들어 보았다.
“예전에 선방에 앉아서 3년 이상 용맹정진을 한 적이 있어요. 3년 정도는 졸음을 조복 받았는데 3년이 지난 뒤부턴 졸음이 와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졸음보다 큰 마구니는 없어요. 하루 열 시간 앉아 있어도 절반은 졸음으로 때우는 것 같았어요. 어쨌든 당장 눈앞에 가로놓인 생사해탈이 가장 큰 문제인지라 출가본분을 자꾸 일깨웠지요. 그런데 졸음이 올 때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목탁을 치면서 기도정진을 하니 졸음도 조복 받고 또 신도님들과 함께 기도를 하다 보니 저절로 포교도 되더군요.”
스님은 그냥 염불만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뭐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가?’ 등 화두를 챙겨 항상 의심을 끊이지 하고 하는 것이란다. 선의 중심이요, 핵심인 의단독로(疑團獨路)의 길을 나름대로 계발해서 가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는 응당 그의 수행에 합당한 공양이 있게 마련일 터, 너무나도 철저하게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고 있는 정관 스님에겐 어떤 공양이 올려지고 있을까? 어린이 포교가 불교의 큰 불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의 불사요, 나아가 인류의 불사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어린이 포교에 주력해 온 정관 스님의 큰 원력불사에 힘껏 동참하는 대한 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공양물이 스님을 기쁘게 한다.
“포교는 종교의 생명입니다. 또한 수행은 포교의 원동력입니다. 자기 내면이 무르익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진실의 바탕이 무르익으면 우리 사회의 불신도 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흐름을 똑바로 보고 힘차게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교정신이 필요합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의 부처님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일이 곧 애국입니다. 자기와 타인에 대한 존엄성을 흔들림 없이 심어주고 주인으로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의 원융사상이 전체 국민화될 때 이 땅은 그대로 불국토가 되지 않겠습니까. 미래의 역꾼을 기른다는 점에서도 어린이 포교는 절대 절명의 사명입니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영주암 부설 유치원에 다니는듯한 어린아이가 스님께 합장을 한다. 아이를 보고 활짝 웃는 스님, 아이나 스님이나 그대로 천진불(天眞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