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상(物相)과 그림 내가 하나되어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선서화가(禪書畵家)석정 스님

2007-10-15     관리자

일찍이 ‘금강산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그림을 그려왔던 석정스님은 보현행원품과 선과 그림을 좋아하여 삼락자 라고 불린다. 주로 선서화(禪書畵)로 불리우는 스님의 그림은 한 분의 난초를 보는 양 그 선의 흐름이 유연하면서도 일정한 품격을 지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망상을 쉬게 하고 도에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편안하게 해주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흔히 그림과 자신과 물상이 하나가 된 그림으로 걸림이 없고 극히 자연스럽게 표현된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그림은 한 가지에 몰두해서 번뇌망상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린 그림으로 일종의 선(禪)의 경지에서 그린 그림이라고나 할까…
번개같이 번득이는 지혜의 관찰력으로 사물을 직관하고 선(禪) 수행으로 다듬어진 맑은 먹과 날카로운 붓으로 그리거나 쓴 것이다. 이는 그대로 자화상이요, 무언설법(無言說法)이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망상을 쉬게 하고 도(道)에 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부산 선주산방(禪住山房)에 계시는 석정스님은 주로 이러한 선화(禪畵)를 그리신다.
선(禪)과 보현행원품과 그림을 좋아하여 항상 삼락자(三樂子)라고 낙관된 스님의 그림은 마치 한분(一盆)의 아름다운 난초를 보는 듯 그 선에 격조가 있고 향기가 배어 있다.
선의 흐름이 유연하면서도 일정한 품격을 지니고 있고, 마치 새벽에 물상을 보는 듯 간명하며 절제된 선에서 오히려 사물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스님이 쓰는 글씨도 꼭이 무슨 체라고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스님만의 독특한 체로 그림의 선과 매우 흡사하여 전체로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로 선시(禪詩)와 더불어 소개되는 스님의 그림을 보아오면서 스님의 작품 내면의 세계를 알고 싶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그 무슨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듯해서였다. 얼마 동안 기회를 보던 차에 모든 사물들이 제자리를 찾고 마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늦가을 스님을 뵙고자 부산에 있는 선주산방을 찾았다.

뫼살던 버릇남아 뫼(山)아래 터를 사니
배경도 좋거니와 전망이 더욱좋이
그밖에 시장먼것을 탓할나위 없어라.

이삼년 힘을모아 용도맞춰 집지으니
남향이라 볕잘들고 드높아서 시원하이
물맑고 군맛없으니 차마실만 하여라.

일어나면 예불하고 밥먹으면 붓잡으니
몸은 늘 바쁘지만 마음은 한가롭네
사는데 시은(施恩)적으니 더바랄것 없어라

스님이 지은 선주송(善住頌)에서 보았듯이 선주산방은 스님의 사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깔끔하면서도 검소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문득 미치는 생각이 스님과 스님의 거처와 살아가시는 모습, 그리고 스님의 그림과 글씨가 하나처럼 닮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스님의 그림에서 느꼈던 것처럼 한분의 난초와 같은 것이었다. 그다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고요와 평화를 석정스님에게서 보았다.
선서화에 대한 이런 저런 말씀을 들으며 “스님과 그림이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했더니 조용히 웃으시며 “그 공장에 그 그림이지요.”하신다. 스님의 그림은 어찌보면 선험적으로 타고 난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스님이 출가를 하고 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이미 전생부터 지어온 업력에 의해 그렇게 되어지도록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신계사 근처 봉래동에서 태어난 석정스님은 세 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외아들인데다 놀 만한 친구도 없었고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는 스님들의 얘기를 더 좋아하며 자랐다. 법당의 탱화나 동상, 그리고 나한전의 나한님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불화나 등상불을 볼 때마다 한번 그려 보고 싶고 만들어 보고 싶었다. 원래 성격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다는 스님은 한번은 신계사에 있는 나한전에 들어가 나한님을 제껴 밑 부분의 종이를 떼어 복장이 나와 그것을 살피다가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소질에 따라 양성해야 된다는 교육관을 갖고 계신 어머니(어머니는 당시 학생이었다)가 그림을 그리라고 백노지 100장을 사주면 몇날 며칠을 새며 몽땅 그림을 다 그리는 통에 불면증이 생기기도 했다. 종이가 다 떨어지면 나무 위나 바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금강산에는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관광객을 안내하는 택시기사들에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발견되고 사람들은 스님의 그림을 보고 신동이라고 했다.
열네 살 때까지 주로 금강산에서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었고, 그 곳에서 스님은 한 기인(奇人)을 만나기도 했다.
그 사람은 자수성가한 함경도 북청사람으로 50이 넘은 나이에 고시공부를 하기위해 신계사에 와 있는 사람이었다. 한 달에 꼭 한 번씩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마셨지만 그는 매일 생식을 하며 하루에 1시간씩은 꼭 참선을 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그 분이 “달마를 그려보라.”고 했다. 스님의 그림을 본 그 사람은 “이렇게 필력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종이를 사 줄테니 계속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필력탓만 하였다.
관상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던 그 사람은 루즈벨트, 나폴레옹, 손문 등의 관상얘기를 하고 경허스님의 사진을 보여 주며 “이렇게 생겨야 장부상이라며” 그 당시 금강산 여여원(如如院)에 내왕하시는 효봉 스님은 정말 잘 생겼다고 말하며 도인이더라고 했다. 그리고 신계사 스님으로는 장래성 있는 사람이 없으니 효봉 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14세 때 집을 나와 송광사를 간 스님은 그 곳에서 탱화를 그리는 일섭 스님을 만났다.
그 때는 마침 중심부에 좀이 슨 사천왕상의 보결불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을 수가 없었다. 불사하는 것을 왠 종일 보고, 밤에는 졸며 낮에 본 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주위의 어른 스님은 “경을 배우고 선(禪)을 하라.”며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함에도 그림에만 관심이 있자 마침내는 일섭 스님을 따라가라 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14세부터 일섭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며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화를 그리면서 참선을 병행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보현행원 100일 기도를 하면서 원상(圓相)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을 좌에서 우로 그려 보고, 우에서 좌로, 또 천천히 시작해서 빨리도 그려보고, 빨리 시작해서 천천히 그려 보는 등 다양하게 그리는 것을 매일매일 수행일과로 삼았다. 이것이 선화를 그리는 기초가 되었고, 이후로는 달마와 포대화상, 그리고 한산ㆍ습득을 그리면서 글씨도 쓰게 되었다.
“사실은 선화니 선서니 하는 이름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한 화법이 없어요. 화법이 있다 할지라도 정진과 하나일 경우 선화가 되지요. 정진과 붓놀림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선을 하면 관찰력이 예민해지고 모든 사물이 간단명료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물상들을 간단명료하게 처리하게 되지요.”
“그리고 가끔씩 선화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선화는 화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거예요. 다만 방편으로 선서화를 배우고 싶으면 먼저 고인(古人)의 서체(書體)를 선택해서 습득한 뒤 사군자ㆍ산수(山水)ㆍ인물 화조(人物 花鳥) 등을 차례로 익혀 체득해야 한다. 그런 뒤 선지식을 찾아뵙고 화제(話題)를 결택(決擇)하여 꾸준히 참구하면서 원상을 좌우지속(左右遲速)반복해 그려보도록 하라. 그렇게 해가노라면 붓과 화두가 하나가 되어 자연히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게 될 것이니 그 때 떠오르는 생각을 그리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그리면 선화요, 쓰고 싶은 대로 쓰면 그것이 선서(禪書)라고 말해주곤 하지요.”
올해 63세가 된 스님은 불화와 선서화로서 일생을 일관해 오셨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전통의 맥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다. 근세조선 500년 동안 단절된 불화의 계보를 잇기 위해 낡은 불화를 보수, 「불화전집」을 내는데도 많은 정성을 쏟고,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일섭스님의 계보를 전승하기 위해 송광사 근처에 제답을 마련하고 스님의 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애초부터 세상의 명리와는 무관한 듯 자연스레 출가하여 그림과 글씨에 달관한 석정스님을 뵈면서 왠지 가슴에 남은 티끌마저도 사라지는 듯 하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는 듯 하였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