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 기도를 회향하면서

신행수기 3

2007-10-15     관리자


*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부처님
저의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방이동으로 이사를 왔지만 학교는 압구정동 신사중학교를 다녔습니다. 통학거리가 멀어서 학교 다니기가 좀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불평없이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늦으면 꼭 집에 연락을 하는 아이인데 그날만은 아무 연락도 없이 9시가 넘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네에 같이 다니는 친구 집에 연락을 해보았더니 4시40분쯤 상준이는 집앞 정거장에서 내렸답니다. 혹시나 하여 동네에 오락실, 분식집, 책가게 등을 모두 다녔지만 저의 애는 없었습니다. 허탈감과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는데 급히 벨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상준이냐”하며 문을 연 순간 저의 애는 창백해진 얼굴로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옷은 엉망이고 가방은 흩어진 상태며 신발은 진흙덩어리었습니다.
“엄마 빨리 문 닫아요”하더니 불안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준아 어찌 된 일이냐?”하였더니 “엄마 무서워 무서워”하면서 지금 도망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님’과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독송하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아들을 안정시켰습니다.
몇 시간 후 저의 애는 늦은 이유를 소상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아저씨 셋이서 자꾸 가는 길을 막으며 시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하는 순간 양쪽에 두 아저씨가 흉기를 대며 팔을 꼭 끼더니 소리지르지 말고 무조건 내말대로 하라고 하더니 길가에 세워둔 스텔라 자가용에 밀어 태웠답니다. 차에 타는 순간 눈은 검은 수건으로 가리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답니다. 차속에서는 그 아저씨들은 대구로 갈까 부산으로 갈까 하며 우리애의 가방과 주머니를 다 뒤지며 전화번호, 집주소, 학교 이름 아버지 직장과 이름 등을 자세히 묻더랍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속에서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울었답니다.
그 순간 엄마가 “너희들은 착한 아이들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도와 주신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엄마 얼굴만 생각하며 마하바라밀을 계속 염송하며 “부처님 도와 주세요”를 간곡히 원했답니다(그 때 저희 애들은 불광목련법회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가다가 모두 차에서 내리더랍니다. 눈은 계속 가려놓고 애를 무슨 베니아 판 같은데 등을 대고 세우더니 흉기를 던지며 겁을 주더랍니다. 정말 악몽같은 시간속에 다리에 힘이 없고 떨리며 기절할 것같이 무서웠지만 엄마와 부처님을 찾으며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끼리 빨리 다른 쪽으로 가자는 쪽과 이 아이는 순진하고 착한 듯하여 안되겠다며 보내자는 한 사람과 의견 대립이 생기더니 저희들끼리 의견충돌이 생겨 분위기가 험악해졌답니다.
얼마 뒤에 대강쯤 되어보이는 사람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우리 상준이를 차로 끄고 가려는 순간 한 사람이 상준이에게 오더니 나는 다쳐도 괜찮지만 너는 내가 봐 줄테니 열을 셀 때까지 빨리 도망가라며 다른 사람을 덤비지 못하게 막고 묶은 손과 눈가린 수건을 풀어줬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큰 찻길 나오는 곳을 향해 달려나와 제 정신 아니게 집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 곳이 지금의 올림픽선수촌 근처에 허허벌판 공사터였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악몽같은 그 순간에 어리석은 범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됐을 일이 한 순간에 부처님 같은 청정한 마음으로 바뀌어 우리 아들을 도와 주신 그 부처님, 생각만해도 그 위험한 순간을 잘 도와 주시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시는 부처님의 무한 위 신력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남달리 저에게 부딪쳐지는 크고 작은 갖가지 사건들이 나를 더욱 큰 그릇으로 성장하게 해주시는 부처님의 위 신력이라는 것도 또한 실감하며 항상 합장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주에 가득채울 것입니다.

*불광법회와의 만남
그간 법회 참여를 거의 못한 생활 속에서 언젠가는 부처님법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신행자가 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며느리며 어머니며 아내의 책임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인내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가정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남편도 훨씬 저를 이해해 주셨으며 부처님 말씀을 해도 귀담아 들어 주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반상회를 하게 됐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 다니는 어느 분이 우리 집에 걸려 있는 관세음보살님 탱화를 보더니 “절에 다니냐?”며 “절도 공부를 많이 한다면 서요”하더니 “잠실 어디에 아주 부처님공부를 철저히 하는 절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귀가 번쩍하여 ‘이제 쉽게 법문을 들을 수 있겠구나’하며 무척이나 반가왔습니다.
저는 그 절을 찾기위해 남편의 협력을 얻어 일요일에 부지런히 찾아 나셨으나 바깥 출입을 잘하지 않은 탓으로 길눈이 어두웠습니다. 늦게 불광사에 도착하여 앉았을 때는 광덕 큰스님께서 법문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광당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 끝이 쭈삣해지며 광덕스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꼭 청담스님 모습으로 바뀌어 제 마음을 혼돈시켰습니다. 그 때 그렇게도 뵙고 싶었던 인자하신 청담스님이 앉아 계신 것같아 겉잡을 수 없이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외우며 이곳까지 내가 온 인연이 우연이 아님을 새삼 느끼며 ‘기필코 불광에서 공부하는 불자가 되리라’를 마음속으로 다짐 했습니다. 이것이 저희 불광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불광법회에 다니면서 바라밀 생명을 강조하신 큰 스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으로 용맹정진’하는 제 자신을 확인하고자 불광법회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85년 3월 방이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 저는 불광사와 가까운 곳으로 온 것을 제일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이웃 불자들의 밝음과 활력이 넘치는 걸림없는 태도며, 법등을 구성하여 같은 이웃끼리 도반이 되어 전법하며 기도하는 것은 좋았으나 제생각에 타종교의 신앙활동과 비슷한 법등 모임에는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방이법등의 한일원이 되고 불광법회를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 법등모임은 당연히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제 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나달이 밝음과 활력있는 불자로 바뀌어 졌습니다.
불광법회에서는 모든 경전이 한글로 해석되어 쉽게 독경할 수 있어서 좋았으며, 스님께서만 하시는 줄 알았던 예불은 어느 신도든지 할 수 있겠금 교육해 주시는 것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생명의 불성을 지닌 만능자임을 일깨워주시는 큰스님께 항상 감사드리며, 기도 정진하는 불자의 몫을 다한 연후에 광덕 큰스님을 찾아 깊은 뜻의 감사예배를 올릴 것을 원으로 세웠습니다.

*천일 기도를 하게 된 동기
새로 이사온 저의 동네에는 유난히도 새벽 기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활기있게 정진하는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부엌에서 일하다 밖을 내다 보면 언제나 한결같은 밝은 표정으로 기도하도 돌아오는 방이법등 가족들은 저에게는 떠 오르는 아침 햇살과 같이 용기와 힘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86년 9월 22일 저는 용기를 갖고 친정 아버님 생신을 기하여 새벽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심되어 정성을 다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뜻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불광사 대웅전을 들어서니 30여명이 넘는 불광 가족들이 새벽기도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순간 저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고 저의 게으름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한번 불광을 찾은 것이 감사했으며 방이법등 도반들이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매일 새벽 3시 50분쯤이면 틀림없이 눈이 떠지는 제 자신이 너무 신기하였으며 무한의 힘으로 이 몸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 벅찼습니다. 나도 새벽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마음으로 발심하여 불광에서 배운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으로 정진할 수 있는 나를 확인하고자 86년 10월 20일 1000일 새벽기도 입재를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시간을 정한 것은 주부 역할을 하는 생활인이기에 시간 약속을 꼭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예불 시간도 최소한 한시간 이상으로 정했습니다.

*1000일 기도 과정과 회향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되는 기도, 저는 신이 나고 생활의 활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약 100일이 지나서 어두운 새벽길에 집에서 급히 나오다 아파트 입구에 가로쳐있는 쇠줄에 걸려 심하게 넘어졌습니다. 얼굴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힘쓰며 넘어진 것이 가슴과 손목에 심한 타박으로 가슴뼈는 부었으며 호흡하기도 불편할 정도로 가슴은 조이듯 통증이 심했습니다. 몸을 움직이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러설 수 없다 라는 강한 의지로 부처님과의 약속이 저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 때의 아픔은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불광요전으로 아픈 곳을 꼭 누르며 택시를 잡아타고 조심스럽게 숨을 모아 쉬며 불광사에 도착하니 예불은 이미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위기에 방해가 될까봐 통증을 힘겹게 참으며 다른 날과 똑같이 저는 기도를 해냈습니다.
아픔을 참으며 기도한 자신이 지독하기도 하고 대단한 인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 후 3개월 동안 병원과 물리치료를 다니면서도 더욱 긴장하며 하루도 쉬지 않는 철저한 기도를 했습니다.
태양은 오늘도 쉬지 않고 밝아오듯이 저의 기도도 항상 꾸준해졌습니다. 완치 후 바른 몸을 쓸 수 있다라는 사실에 감사하여 더욱 힘이 생겨 3000배(3회), 1000배(21일, 300배 100일) 참선, 염불독경, 수련법회(송광사 5박6일)등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부지런히 기도정진하는 힘을 기르려고 애썼습니다.
또한 1000일 기도 중에는 가급적 필요 이상의 말을 삼갔습니다. 그러나 보니 저에게는 행동과 언행에 침착성이 생겼고 부동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기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힘든 어떤 환경도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지식으로 생각되어 감사한 마음과 배움으로 굳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 있어서 ‘무가치한 시간이란 일분도 소홀히 할 수 없다’라는 마음을 내고 기도시간이 아닌 모든 일상생활이 기도며 불법인 것을 확실히 몸에 익히게 되었습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도 처음 발원과는 달리 나를 떠난 모든 것이 참생명으로 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었으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한마음인 것이 확인되어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떠한 일도 최선과 정성을 다하는 생활인이 바로 전법자임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도정진하는 것은 참자기를 찾아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확인하는 과정의 밝고 맑은 시간인 것을 알았습니다.
드디어 7월 16일 그 날은 불광사 50일 기도회향일이고, 구도정진일이며, 저의 1000일 기도 회향일이기도 했습니다. 불광가족들과 함께 회향기도를 할 수 있게 된 행복감을 만끽하며 대웅전에서 철야 6시간동안 3000배를 끝으로 1000일 기도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과 벅찬 기쁨의 눈물과 땀으로 온 몸은 젖었습니다.
순간 큰스님께 달려가 “제가 부처님께 약속을 잘 지킨 문수심입니다”하고 말씀드리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한편 그리고 청담스님께서 도선사 백운정사에서 불명을 주셨을 때의 감회도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1000일 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쉬움과 용기로 가슴 벅찼습니다. 글로는 다 쓸 수 없지만 그 때 그 때 힘든 고비를 슬기롭게 기도정진하게 해주신 무한한 부처님 가피력에 감사 또 감사드리는 환희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또한 주위의 모든 분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울 수가 없었으며 저의 가족들과 불광의 모든 도반들이 제 기도를 해주신것 같았습니다. 마음과 함께 따라와 준 육신이 대견스럽고 후덥지근한 삼복더위속에 3000배 최향기도 이건만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2700배 하고 300배의 시간은 힘들고 무척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지난밤 유난했던 천둥 번개와 빗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마음을 아는 듯 솟아오르는 새벽태양의 밝은 햇살은 뜨겁게 온 곳은 가득 채웠습니다. 불광사 나서는 내 발걸음은 가벼움 그 자체였습니다.
16일 일요법회에 참석하니 법등 가족들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기쁜 마음과 밝은 빛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의 밝음으로 꽃피어 자비하신 부처님 전에 가득히 공양되었습니다.
나 혼자만은 절대로 존재할 수도 살 수도 없는 환경에서 온 우주 모든 생명체와 무정물에 감사하고, 우리 인간만이 갖춘 지혜와 자비심으로 이웃을 돌보며, 선망 조상님을 생각하는 굳건하고 바른 신심을 갖추기 위해 나는 오늘도 육바라밀을 행하는 불자가 되어 모든 중생의 촛불이 되어지어다를 발원했습니다.
*1000일 기도를 마치고 난 지금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을 확인하고자 혼자서 1000일 기도의 원을 세울 때는 부담감과 끝가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며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제 생활은 더욱 더 힘이 생겼고 몸은 가벼워졌으며 새벽에 눈만 뜨면 바쁘게 움직여 대는 몸놀림으로 일분 일 초를 아깝게 여기는 하루하루 보낸 일과였습니다. 1000일 기도를 하는 동안 그렇게 신나고 세상이 밝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즐거움과 환희속에서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의 감사함을 힘차게 외치며 ‘마하반야바라밀’을 언제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괴로움으로 부딪치는 어떤 원결도 대립이 없는 평화스런 마음으로 곧 안정되고, 조그마한 것도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바뀌어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기도하는 행동이 생활화 되었습니다. 사물을 대하는 관점도 정립되어 갔습니다. 제 마음이 가는 곳, 머무르는 곳마다가 다 법도량이며, 보이는 것마다 부처님이고, 느끼는 것마다 법문인 것이 무한한 부처님 생명속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까운 친구와 이웃들이 나와 같이 평화스러움과 무한한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의 만법자임을 함께 나누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웃을 밝혀야 될 사명감을 갖고 기도정진하는 불자가 될 것입니다
1000일 기도면 최고의 기도가 되는 줄 알았던 저는 큰스님께 만일기도 결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님앞에서는 나하고 거리가 먼 기도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계산해보니 앞으로 27년 5개월이었습니다. 내나이 73세가 됨을 알고 만약 내가 이 약속을 못지킬 운명이 됐을 때는 내 자손에게 이어줄 것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은 시간에 만일기도를 알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마하반야바라밀’염송으로 정진하여 세세생명 보살도를 닦을 것입니다. 다생겁래로 맺어온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용맹정진하여 바라밀국토로서 역사를 밝힐 것을 다짐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참고로 저의 기도일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새벽4시30분 시작 1. 삼귀의, 2. 천수경, 3. 반야심경, 4. 금강경(1독 이상), 5. 바라밀염송(1000념이상), 6. 발원문(보현행원의 수학 분), 7. 예경(108번 이상)
저녁예불은 가정살림으로 일정한 시간이 불가능했으며 잠자리 들기전에 삼귀의 바라밀염송 1000념 이상으로 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각기도를 했을 때는 다음날 두배로 하고 지각기도를 한 것은 6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