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의 확립이 시급하다

푸른 목소리

2007-10-15     관리자


어느 고을로 들어가는 길목이 딱하나 있었는데 그 길목에는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호랑이는 어떻게 된 셈인지 행인중에서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다 놔두고 뭔가 하나라도 불구인 사람만 잡아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길목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길목을 지나려는 사람들이 목로주점에 모여 들었는데 하나같이 불구자였다. 한 사람은 등이 굽은 곱사였고, 또 한 이는 눈이 하나뿐인 애꾸였으며, 다른 이는 날 때부터 다리 하나가 조금 더 긴(?) 절뚝발이였다.
주막에 모인 다른 사람들과 주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섰다는데, 그들은 무사히 지나갔을까? 지나갔다면 무슨 수를 썼을까?
이러한 문제를 법회시간에 내어 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셋이 다 업어서 불구인 부분을 어떻게 가리는 방법을 찾아가겠지’, 옛 이야기에도 다리 성한 젊은이와 눈이 밝은 노인이 합심해서 살아가는 정담어린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불구인 모습을 구분할 줄 아는 호랑이에겐 안 통하는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문제에서 주어지는 상황에 맞추어 그것을 풀려는 노력을 전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이렇다.
곱사등인 사람이 쭈그리고 엎드려서 땅에 곧은 막대를 대고 한 손으로 줄(線)을 그으면서 나아가고, 애꾸인 사람은 한 손으로 못보는 눈을 가린 채 “어이, 줄이 삐뚤어졌잖아, 오른쪽으로 바르게, 그렇지‘하면서 쫒아간다. 그러면 절뚝발이인 사나이는 ”원, 사람들도 장난을 그렇게 좋아하나···“하면서 비척비척 발바닥으로 줄을 지우며 따라 간다는 것.
그동안 교계에서 봉은사 · 동국대사태, 조계 · 태고간의 사찰분규, 신생종단들의 난립, 남북교류 업무의 주도권 행사에 관한 일, 제도재혁 등 여러 갈래로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위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우리가 정말 부처님의 제자가 맞는지?
불교를 믿지 않는 이에게 우리를 알리고 자랑할 때는 물론, 매번 법회때마다 강조하고 강조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용하신 방법(中道)대로 하자. 그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남에게는 전혀 아니올시다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왜인까.
남북불교 교류에 관한 주도권 싸움만 해도 그렇다. 불교계의 교류 단체는 종단협의회, 남북교류추진협의회, W `F ` B, 불교방송국, 조계종의 교류추진위원회, 태고종의 교류협력위원회 등 10여개나 된다. 단체는 많지만 따지고 보면 조계종계와 태고종계의 두 단체 외에 별로 다른 것이 없다. 또한 종단협의회 · 방송국 · 조계종(법주사)에서 북한의 불교도를 초청한 것과 태고종에서 단청 및 범패 지원 의지를 표명한 것 외에는 이렇다하게 한 일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 단체가 교류의 주체가 되겠다고 서로 나서고 있다. 크다, 먼저 생겼다 하는 그야말로 도토리가 키재는 격을 연출하고 있다.
불구자 잡아먹는 호랑이 앞에 가서도 우리는 두 눈이 성하다, 등이 곧다. 다리가 튼튼하다 할런지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가 진정 부처님의 제자라면 세계인류 모두를 제도해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도하고 그러기 위해 북한 동포에게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남북불교 교류의 본래 목적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누가 대표가 되든간에 남북불교 교류가 실질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방향에 목표를 두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계를 대표하고 있는 종단협의회를 대표기구로 하고, 나머지 단체에서 실무위원회의 대표를 맡아서 각기 ㄷ단체의 특성과 능력에 따라 분야별로 활동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만일 절음발이가 엎드려 줄긋고, 애꾸눈이 검사하고, 곱사가 줄을 지우면서 간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결과는 뻔한 것 아닌가?
아무리 껑 잡는게 매라지만 윤회전생을 알고, 업보와 역사의 엄정한 법칙을 믿고 있는 우리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이 바르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옳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나, 방법이 그르면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비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격지 않았는가?
누구에게나 다 하라고 가르치고 나만 못하는 중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불교인의 사회참여의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눈 먼 봉사가 발을 잘 못 디더 개천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이 때 물 옆에는 세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유생, 승려, 목사였다.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자.
유생 말하길 “모름지기 군자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법이오”,
승려는, “당신이 빠질 인연이 있었기에 빠졌으므로 나올만한 업을 지었다면 나올 수 있으리니 걱정하지 마시오”하며 지나가고,
목사는 몸소 뛰어들어 구해내더라.
군자가 남의 위험을 모른 채 할리 없거니와 성불과 제도중생을 목표로 출가한 승려가 위험에 빠진 이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놔둘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생제도, 자비··· 등의 좋은 말씀과 이론을 물려받은 우리들이 그 가르침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물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이오’하고 지나갈 줄 알았던 목사는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지 못하고 잇다는 이야기다.
참회를 해도 단단히 해야할 일이다. 사회참여가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항상 문제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시각으로 분석하여 바른 방법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기 · 물 · 땅의 오염과 필로폰 등 마약의 사용에 의한 인간의 오염 등 물질공해, 불특정다수를 향한 범죄 · 정치인들의 사리도모 · 경제인들의 비도덕성 등의 정신공해에 대해서도 교계가 제 역할을 수향해야 한다.
사실, 그동안의 우리는 이러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다고 누누이 말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이 아니고 그 대상이 문제다. 지금까지는 정치의 대상이 되는 일반 국민, 가진 자가 아닌 못가진 자가 주로 그 대상이었다.
불교 교화의 대상은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이 아니라 깨달은 자와 못 깨달은 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구분하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에 따를 때 우리가 더욱 관심을 잦고 옳게 지도해야 할 사람은 가진 자요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은 못가진 자인 것이다.
중도적인 방법론의 확립과 가진 자에 대한 바른 견해의 지도, 못가진 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