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 공예 - 서민의 예술품

우리 얼 우리문화

2007-10-15     관리자

가치있고 귀중한 문화재란 어떤 것일까?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떨친 고려청자나 신랑ㅢ 미륵보살상 같이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만이 귀중한 문화재일까?
우리는 흔히 ‘문화재’라는 말을 들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지방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빼어난 문화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고, 또한 그 곳에 가야만 우리의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로 국립박물관이나 지방의 국립박물관들, 호암미술관을 비롯한 사설 박물관에는 뛰어난 문화재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어서 시간을 초월하여 민족문화유산으로서의 찬란한 역사의 빛을 항상 내어뿜고 있다. 그곳에는 몇 번을 방문하여도 볼 거리가 있으며, 말없는 가운데에 우리를 사색하게 하는 역사의 부르짖음이 있다. 우리는 비록 그 문화재들의 뛰어남을 감상하는 데에는 역부족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보호해야 할 문화재로 인정하는데에는 누구나 주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바로 이러한 내용일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에 소장된 종류의 문화재만이 귀중한 문화재인가? 그 만든 시기가 오래되었으며 그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국보나 보물 등만이 귀중한 문화재이며, 만든 시기도 오래 되지 않았으며 그 값도 하찮은 물건들은 문화재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흔히 국가기관에서 지정한 문화재는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아직도 우리의 주위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 멍석 · 종다래기 · 맷방석 등의 짚공예품과 촛병 · 양념통 ·숱갈통에서부터 강장 · 된장 · 항아리까지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진 옹기는 문화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짚공예품이나 옹기는 역사상으로 볼 때에도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장 많이 만들어서 가장 많이 사용하였지만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 명맥이 끊어져 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짚이라는 소재는 너무나 값싸고 흔했으며 옹기는 어느 집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그릇이었기 때문일까?
짚공예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명석이라고 할 것이다. 십수년전만 하더라도 명석은 시골 농가의 뒷벽에 집집마다 많이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필요에 따라 쓰기는 하더라도 새로 만들어 쓰는 이는 없다. 새로이 짚공예품을 만들어 쓰지 않아도 그에 대신할 공장제품이 많이 있기도 하려니와 이제는 짚공예품을 만들려고 해도 질기고 때깔좋은 짚은 구하기가 어려ㅃ다. 비료와 농약으로만 키우니 좋은 짚은 점점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요즘의 농촌현실인 것이다.
그 집안의 멍석은 현재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그 웃대의 조상들이 몇십년 전쯤에 만들어 놓은 것들로 자기의 후손들이 대대로 쓸 것을 감안해서 정성을 모아 꼼꼼하게 엮어놓은 것이다. 비록 그 멍석이 오랜 기간동안 자구 사용됨에 따라 귀퉁이가 닳고 노란 볏짚의 색이 칙칙하게 변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멍석을 만든 웃 조상의 애틋한 정성의 손길은 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멍석 한 개를 짜려면 보름에서 한달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사일이 바쁜 여름철을 피하여 한가한 겨울철에 짜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손길로 짜여진 멍석은 매우 다양한 쓰임새가 있었다. 농사철에는 나락을 널어 말리는 자리가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바깥 어른들의 윷놀이판으로 해마다 사용되었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시골의 친척집에라도 놀러 갔던 어른들은 무더운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로 깔아놓은 멍석에 누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던 기억들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결혼식이나 회갑연 등은 물론이고 장례식이나 굿마당에까지 그 멍석들은 황토빛 마당에 여러장이 펼쳐졌으며, 앉을 자리가 비좁을 경우에는 앞집 순이네와 뒷집 돌이네의 멍석을 빌려다 그 마당에 깔기만 하면 손쉽게 오신 손님들을 접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멍석은 그것을 만든 이의 정성과 함께 인생살이의 모든 애환이 깃들어 있다. 기쁠 때도 쓰여지고 슬플 때도 쓰여지며 도망갔던 노비가 잡혀와 멍석말이를 당할 때의 아픔도 배어 있다.
사진 1은 쉽게 말하자면 댤걀바구니이다. 예전의 농가에서는 대개 대여섯마리의 암닭들을 기르고 있었고, 또한 그 닭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알을 낳도록 하기 위하여 짚으로 닭둥우리를 만들어 주었다. 학교에서 갓 돌아온 아이들은 사진과 같은 바구니를 들고 닭장속에 들어가 닭둥우리에서 암닭들이 낳아놓은 달걀들을 꺼내어 바구니에 넣었다. 이 달걀바구니는 달걀을 여러개 넣어도 서로 부딪쳐 깨질 염려가 없고 또 한 조그만 충격에는 견딜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개의 농촌 할아버지들은 손자나 손녀들을 위하여 이러한 바구니를 만들어 주었고 또한 어린아이들의 부주위로 달걀이 깨지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달걀바구니를 들고 어두침침한 닭장속에 들어가 기대감 찬 손으로 닭둥우리를 뒤지던 어린날의 추억들은 지금같이 하루에도 수천개, 수만개씩 달걀이 쏟아져 나오는 양계장의 모습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잘 만들어진 닭둥우리나 달걀바구니를 통해서 옛생활의 조각들을 되돌아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사진 2는 둥구미의 일종인데 지역에 따라서는 둥구먹 ·둥구니 · 둥구매기 · 봉새기라고도 하며 이런 형태의 그릇은 우리들의 농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릇은 곡물에서부터 시작하여 밤 · 호두 · 잣까지 담을 수 있도록 그 크기가 다양한데 사진에 보이는 그릇은 매우 작은 용기로서 할머니 밤이나 호두 등을 담아 감추어 두었다가 귀여운 손자나 손녀가 오면 몰래 꺼내어 주었음직도 하다.
이 그릇은 안쪽에서부터 짜올린 다음 다시 아래쪽으로 짜내려 간 후 밑바닥 가운데에서 마무리를 하였는데 검은 선처럼 보이는 것은 삼껍질을 같이 짜넣어서 멋을 부리기도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론 만든 이의 것이라는 표시이기도 하다.
사진 3은 삼태기 형태의 그릇인데 삼태기처럼 무엇을 쉽게 담을 수 있도록 한쪽면이 경사가 지지는 않고 똑같은 높이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그릇들은 대개가 조금 큰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귀여운 맛이 없는 편인데 사진에 보이는 그릇은 가로가 30cm, 세로가19cm,높이가 11cm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형태로서 앞쪽과 뒤쪽에는 삼줄을 넣어 짠 부분이 있어 소박한 멋을 풍겨 준다.
이외에도 예전의 우리 농가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짚공예품이 있었고 또한 지금도 그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얼핏 생각나는 것만 하여도 짚신 · 메주틀 · 망태기 · 꼴망태 · 김장독을 덮어주던 두트레방석 · 아궁이 앞에서 불땔 때 앉은 짚방석 · 씨뿌릴 때 스는 종다래기 등 이루다 적을 수가 없을 만ㅋ큼 그 종류가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짚공예품이야말로 대다수 한국의 서민들이 써왔던 것이며, 조금도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이해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래된 골동품처럼 값이 나가는 것만이 문화재라고 생각하는 일반적 사고를 한발자욱 비켜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짚공예품이나 옹기 등도 우리의 넉넉한 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즐겁고 기쁘게 포용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