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하면 병통이 있게 마련

神의 고전 / 선문단련설(禪門鍛鍊設)7

2007-10-15     관리자

7. 기묘하게 돌이키다
깨닫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지 모르나, 스승의 방편 아래에 투탈하는 것과는 그 공용이 관연히 다르다.
무턱대고 참구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안일하여 선지식의 엄한 수단이 아니면 10년, 20년이 되어도 깨닫지 못한다.
즉, 어떤 때는 속으로만 허물을 감추고 있거나, 두 칼이 맞붙어 싸우는 경우에도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
스승의 방편 아래에서 투탈한 자는, 속이는 마음이 반드시 사라지고 의근(疑根)이 다할 것이며 해로(解路)가 끊어져서 어떤 험난한 방편 아래에서도 더욱 힘을 얻고 칼놀림도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선지식 중에서 오도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방편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마조와 백장 · 황벽 · 임제로부터 분양 · 자명 · 동산 · 원오 · 대혜 등의 모든 노덕들이 모두 대기대용(大機大用)이 번개가 번쩍이 듯 우레가 내달리 듯하여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었으니, 한 번 내려치고 한 번 밟고 한 번 호되게 몰아 붙이고 한 번 법을 바꾸고 사용하므로 해서 목숨이 끊어지고 정안이 밝아져서 용상과 같은 무리들이 그름일 듯하고 종문이 이렇게 번성케 되었던 것이다.
원대(元代)이 후에 이르러서 열조(列祖)의 단련법이 불행하여 그저 앉았기만 하는 냉선(冷禪)을 귀히 여겼던 것이다.
찬 재나 고목과 같고 낡은 사당의 향로와 같으며, 뻣뻣하게 동요하지 않는 것을 힘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제조(諸祖)의 기용을 한 가문의 독특한 시설로만 여겼을 뿐이며, 오종(五宗)의 강종을 배척하여 신기한 이름이나 모양을 보듯하여 학자들을 묶어 두었으니, 이로 인하여 종풍이 크게 파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뺏고(奪人) 경계를 뺏으며(奪境) 법을 뺏아 버리는(奪法)임제의 가풍을 모르면 이를 빈정대기 일수며, 암두의 활법을 모르면 확인을 제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법이 이미 유실되어 버린지라, 법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저 죽은 화두를 일러 주면서 그들에게 찬 재나 고목과 같이 앉아 있게 하여 이들을 고목당(枯木堂)으로 끌고 들어가서 말할 줄 모르는 선을 익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묘희가 꾸짖은 묵조사선(黙照邪禪)인 것이다.
그리고서는 방 안에서 비밀히 전수한 것으로 지극한 보배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명나라에 전해져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을 익히는 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는 가와 그렇지 못한가로 공부의 우열을 잣대질 하게 되었고, ‘깨달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듯 국법을 어기듯 금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참선법은 완전히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이 천동 오(天童悟) 화상이 한 방망이로 그 문을 깨부수고 대기용을 분발하였으며, 삼봉 장(三峰藏) 화상이 자신의 가풍으로 그 단련을 행하여 강종을 발출하였고, 나의 스승이신 영은 예(靈隱禮) 화상께서 다시 오가(五家)의 묘밀(妙密)로써 다방면으로 변통하여 널리 군기를 제도하였다.
이리하여 요간(料揀)과 조용(照用)과 빈주(賓主)등의 여러 가지 방편법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종문의 일월이 찬연히 중흥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개 참선이란 깨닫지 못하면 많은 병통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앞 길이 가로 막혀 전진하지 못하는 자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털 끝만한 망상도 끊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화두만을 꼭 쥐고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이도 있고, 혹은 찬 재와 같이 침좌(沈坐)하여 그것으로 본분으로 여기는 자도있다.
어떤 자는 눈썹을 움찔하고 눈을 깜작이는 것으로 전제(全偍)로 삼는 자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일어반구(一言半句)에 집착하여 이것으로 깨달았다고 여기는 자도 있으며, 혹은 공안을 전착하는 것으로 박통(博通)이라고 여기는 자도 있고, 혹은 강종을 복탁(卜度)하여 구경을 삼는 자도 있다.
혹은 모든 것을 끊어버린 것으로 향상(向上)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표리가 상응치 못한 것으로 빼어났다고 여기는 자도 있고, 혹은 고금의 공간으로 부질없는 지절(枝節)로 여기거나, 혹은 최후의 관문으로 억지로 사람을 끌어 넣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스승의 가르침으로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강종을 투탈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편벽된 지견이 이렇게 천차만별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훌륭한 선지식인 병에 따라 약을 주고 구멍을 살펴보고 적당한 자루를 박는다. 마치 악사가 악기를 다룸에 손을 따라 바람이 일 듯하는 것과 같으며, 포정(庖丁)이 소를 잡음에 칼 놀림을 따라 뼈와 살이 발라지는 것과 같이, 일기(一機) 아래와 일구(一句) 사이에 능히 학인들로 하여금 사슬을 벗고 심안을 열게 한다. 이러한 법은 방편을 잘 사용 하는데 있다.
법전(法戰)의 방편을 쓰기도 하고 혹은 실중(室中)의 방편, 또는 방편의 방편, 방편을 쓰지 않는 방편이 있다.
법전의 방편이란, 대중 가운데서 다그쳐서 학인이 어떤 대답을 할 경우에 틈이 있거나 허물이 보이면 즉시 공격한다. 능히 반격해 오는 자에게는 다시 추격을 늦추지 말이야 할 것이요, 기봉(機鋒)아래에서 죽는 자에게는 즉시 활인도(活人刀)를 보여서 학인으로 하여금 발 붙일 여지가 없게 하면 명근을 끊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중의 방편이란, 전진할 줄은 알지만 물러날 줄은 모르거나, 혹은 머리는 알지만 꼬리는 모르며 또는 활을 쏠 줄은 알지만 단 발에 그칠 뿐이거나 혹은, 샘 물이 구멍에서 나오더라도 단지 한 구멍에서 나올 분인 경우에, 장로가 그들로 하여금 다시 묻게 하거나 혹은 한마디 말을 대신(代)하여 깨닫게 하거나 또는 한 글자를 고쳐서 확인하게 하여도 상관 없다, 이것은 신선의 국수(國手)며 가장 기묘한 방편이라 할 것이다.
방편의 방편이란 ‘불성의 누군들 없으랴’하면, 별(別)하여 말하기를 ‘누군들 있는가’하여 그 중에 깨달았으며 ‘문에 들어오면 미륵을 만나고 문을 나서면 달마를 만난다’ 함에 별하여 말하기를 ‘문에 들어온들 무엇을 만나며 문을 나선들 누구를 만난단 말인가’하여 그 중이 깨달았으며 내지 ‘장삼이사(張三李四)니라’한 것과, ‘어제는 옳았으나 오늘은 틀렸네’한 따위가 방편의 방편이다.
방편을 쓰지 않는 방편이란, ‘어떤 것이 조계의 한 방울 물인가?’하고 묻자 ‘이것이 조계의 한 방울 물이네’하고 대답한 것이나, ‘병정동자(丙丁童子)가 와서 불을 찾는구나’한 것이나, ‘무(無)의 구름은 산 마루에서 피어 오르고 유(有)의 달은 강심에 떨어진다’한 따위다.
다만 일전어(一轉語)를 거듭 들어서 학인을 깨닫게 한 것으로서, 이것은 방편을 쓰지 아니했으나 역시 방편인 것이다.
“선지식인 제법에 대하여 매미를 잡듯 하며, 구슬을 놀리듯 하며, 이를 꿰듯하여 이를 발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하고 이를 사용하기만 하면 반드시 막힘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능히 강종을 사용하여 활기(活氣)로써 학인을 제접하기 때문이다. 강종을 얻으면 요간(料揀)이 익숙하여 방편을 행할 수가 있다. 손이 정미하고 눈이 날쌔서 기밀을 정확하게 가릴 수가 있으니, 하늘과 땅을 바꾸어 놓고 뭇 별을 옮기더라도 상관치 않고 향상현관(向上玄關)을 누구나 투탈케 할 수 있는 것이다.
본체선(本體禪)만을 소중이 여기고 강종을 알지 못하면, 학인을 일기일경(一機一境)과 이렇게 저렇게 염롱(拈弄)하는 것에 꼭 집착하게 될 것이요, 장로는 방편을 쓸 도리가 없을 것이니 이는 약홍은선(藥汞銀禪)이라, 거짓 닭 울음 소리로 관문을 벗어날 수 있더라도 깨달음이 철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중을 단련하려 하는 자가 강종에 대하여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