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6> 마음의 평화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7-10-13     달라이 라마

  제 3 장 마음의 평화

 우리나라의 재난을 말하기에 앞서 행복했던 시절의 우리들 생활을 설명 해야 겠다. 티벹에??이웃이 많다. 중국,몽고,인도,버마,네팔,시킴,부탄,소련 등이다. 수백년에 걸쳐 우리는 이들 이웃과 우호적이었다. 특히 인도와는 종교적으로 천년을 더불어 내려오고 있다. 한 때는 이란, 터어키와도 연락이 있어 이란의 의상이 비슷하게 남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영국과는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러나 티벹??분명히 고유한 티??종족으로 우리의 신앙, 언어, 풍습은 이웃과 달랐다. 인종으로는 우리 뿐인다.근래에 티벹??알려진 바로는 모두 고립된 곳이라는 정도다. 라사는 금단의 도시라 불렀다. 우선 자연적으로 그렇다. 인도나 네팔서 라사까지는 지난 10년 전만 해도 두 달 걸렸는데 일년 내내 소통하지 못하게 히말라야가 막고 기후가막았다. 중국이 가까운 내 고향에서 라사까지는 앞에 말한대로 더 험하다. 중국 항국에서 시발하면 천마일 이상의 거리다.

 고림은 우리 피 속에 흐르고 있다. 가능하면 외국 사람을 덜 맞이하며 중국과의 투쟁같은 예를 피하려 했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 신앙을 보존하고 평화롭다면 우리끼리 세상 등지고 사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했다. 한 마디로 이 정책이 잘못 됐었다.

 내 희망과 의도는 앞으로 티벹??활짝 열어 놓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려 했다.

 티벹??세상에서 가장 신앙심이 돈독한 나라로 알려졌다. 나로선 여부를 가릴 수 없으나, 보통 티벹사람??물질적 문제보다 정신적 면을 더 여긴다.

 우리나라의 절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출가인은 인구 1할이고, 이 영향이 우리들 사회제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바로 달라이 라마인 내가 출가 재가인의 통치권자요, 수상부터 출가 재가의 복수고 그 이하도 같다. 국무위원은 출가인 1명, 재가인 3명 이 그 밑에 종교담당 출가인 4명, 재정 등 국사를 4명이 돌본다.

 외교, 농사, 세무, 체신, 국방등 일반 행정부서와 대법관 2명 판사 2명의 사업구, 지방 행정에 두 지사가 있다.

 입법부는 위에 말한 출가인, 재가인 8명 외에 3개 대찰 대표 재가인 등 20명이 상시 소집되고 특별한 경우는 30명 정도 확대되고 달라이라마 선임은 총 4백명의 공무원과 민간인이 모인다.

 백성은 빈부가 고르지 못했다. 용맹한 군인의 포상은 사전과 훈작을 줘서 세습이다. 그러나 평등사상으로 달라이 라마의 왕생은 귀천의 차별없이 나타난다. 나 자신도 그 예다. 사찰은 소임에 따라 기술을 활용하고 부찰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개인적인 보시나 공양도 있으나 정부의 후원이 컸다. 그래서 포탈라 궁에 지하실이 있었고 이 예산과 염출은 세금과 사찰에서 생기는 임차세로 충당했다. 

군인은 주로 외국인들 무단입국을 막는 변방수비였다. 또 라사를 제외한 지역의 경찰 임무도 겸했다. 라사의 군인은 내가 행차 때 부대기를 들고 정렬했다.

 약 50년전 내 전임자는 중국을 막으려고 외국사람을 데려와 신식군대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나라 교관이 우수한지 모르니 소련, 일본, 영국을 불러 훈련방법을 보고 영국으로 정했다. 그들이 떠난지 한 세대가 지나고도 1949년까지 영국구령을 쓰고 스코틀랜드 민요, 지난 옛날이나 영국 국가를 연주했다.

 볼품없는 무장으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외세의 침공에서 막는다는 일도 무리지만 병사들은 효과를 봤고 용감했다.

 누구나 티벹??안다면 라사 뿐이었다. 본 곳이 거기 뿐이니, 당연한데 그나마 나의 기동 뿐이었다. 내게 대해서도 내가 써도 그렇게 잘 묘사할 것 같지 않다. 나는 언제나 주인공이니 남들의 촛점이 돼서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행사를 구경하려면 장식으로 가리고 보아야만 했다. 외국인들 소개대로 우리는 잔치를 즐긴다. 종교적이건 아니건 그렇다. 그들눈에는 우리가 태평하고 낙천적으로 보였을 게다. 그러나 라사말이 유일한 사교적 생활이 있었고 그 외에 몇몇 지방 중심지를 제한다면 모두 농사 뿐이다.

 거리는 멀고 떨어졌고, 통신수단은 인편이나 말을 타야 한다. 산세가 험하고 기후는 냉혹하고 땅은 쓸모없다. 따라서 주민은 드물고 생활은 극도로 단순했다.

 거개가 라사에 가보지 못했고 외지사람 구경도 없이 해마다 땅을 갈고 가족을 지느리고 자기들 시야만 안다. 물론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닌 줄 안다.

 나는 우리나라 전부가 친절하고 점잖다고는 않겠다. 범죄자도 있다. 유목민 중에는 산적도 있어 마을마다 자경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내 고향도 질서가 유지되는 곳이었으나, 총이라도 둔 집이 있었다. 그러나 신앙심만은 많았다. 사람 사는 곳이면 아무리 찢어진 천막이라 해도 장명등은 밝혔다.

 나의 교육에 티??외의 사회과학은 없어 특별히 국가관리 이론에 관심도 없었다. 자라면서 얼마나 틀렸는지는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집무한 사이나마 출가 재가 대표 50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를 발족시켜 하나 하나 제도 쇄신을 실천하도록 지시했다.

 세제부터 각 행정단위에서 걷는 타성을 고쳤다. 징수자가 정부서 정한 세액을 멋대로 받고 씀씀이가 옳지 않았으나, 백성들은 그냥 감수했다. 이것을 정액대로 걷고, 다시 지방의 예산으로 하달했다. 토지문제도 고쳤다. 티벹??땅은 국유다. 농민은 임차관계에서 그들의 수확비율로 도조를 냈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출장이 민폐가 됐다. 전임자는 그 근절책으로 역마용 삯을 정했더니 이번에는 삯이 오르고 출장간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출장증을 발급하고 그 삯도 현실화 했다.

 나라령이라 해도 상속이 되니 임차권으로 저당도 잡혔다. 곤궁할 때에도 정부에서 융자를 줬으나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고 뭐고 방관해 어마어마한 단위가 됐다. 나는 우선 조사위원회로 하여금 바로 잡으라고 했다. 판상불능은 사면, 다음 급은 분할상환 또 여유있는 경우는 일시불로 환급시켰다. 땅 문제는 사유지도 혁파했다. 옛날 귀족들의 사전이라고 정부에서 소홀했고, 소작 상태였다.

 주인은 세습적으로 남자 1명을 공무원으로 만들어 나라 일을 보게 하고 그 경비는 수확으로 충당해 왔는데 나중엔 공무원도 싫증이 나서 대리인을 대고 있었다. 나는 이 땅을 보상해 주고 농부들에게 임차하고 공무원은 정부에서 봉급을 줬다. 사원에 대한 토지 관계도 같이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중공군이 우리를 지배하고 중공식 토지개혁을 강행하여 모두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침략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행복한 나라였다. 그들의 압력이 가중돼도 지난날대로 잘 참으면 신앙심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타교 사람들이 업연을 알면 행운의 불평등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티??사람들이 잘사는 사람을 시샘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둔다는 인과를 믿기 때문이다. 또 금생의 노력을 좌절시키지도 안는다. 노력은 금생에도 좋고 내생에도 좋지만 베풀면 남에게도 좋다. 그래서 티??사람들은 현실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땅에 정의롭지 못한 폭군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행복했었다. 탐심에 만족은 없다. 행복은 평화로운 마음을 준다. 티벹??물질적 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우리는 탐심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험준한 산속에서 단조롭고 가난한 속에서도 바깥 세상의 모든 것 보다 더한 마음의 행복을 갖고 있었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