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베풀까 ?

청소년 불교 강좌

2007-10-13     관리자

  많은 경전과 법문을 통해서 불교를 알게 되고 또 많은 것을 얻어 슬기로운 삶의 지혜로 삼는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는 한문 경전과 대승경전이 매우 난삽하고 부담이 되어 그 진의를 깨닫기가 어렵다. 이에 이른바 초기 경전이라 일컫는 아함경에 있는 짤막한 세존의 법문을 통해 현실과 현대인의 갈등을 관조해 보고자 한다. 문답 형식의 게송 가운데 번개처럼 스치는 인정과 지혜가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제가 듣기로는 이러했다. 세존께서 사밧타{舍衛城}의 제타숲{紙陀林}에 있는 아나타핀디카{給孤獨園}에 계시던 어느날 한 선인{善人; 天神}이 늦은 밤에 찬란한 빛으로 숲을 대낮처럼 비추면서 세존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한 옆으로 물러나 앉아 게송{偈頌}으로 여쭈었다.

  무엇을 베풀어야 힘을 주는것이고

  무엇을 베풀어야 맵시를 주는것이며

  무엇을 베풀어야 안락을 주는 것이고

  무엇을 베풀어야 밝음을 주는 것이고

  무엇을 베풀어야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이옵니까 ?

  바라옵건대 제게 설해 주소서.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이르시되,

  음식을 베풀면 힘을 주는 것이며

  의복을 베풀면 맵시를 주는 것이며

  탈 것을 베풀면 안락을 주는 것이며,

  등불을 베풀면 밝음을 주는 것이며

  살 집을 베풀면 모든 것을 베풀었다 하리라.

 그러나 바른 법을 일깨워 주면 감로{甘露}를 베푼 사람이 되리라.

하시니 그 선인이 다시 게로써 여쭈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뵈었네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세상의 집착을 건너

  저 언덕에 이르신 성인을,,,,,,,,

  그 선인은 세존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환희하고 지극한 예의로써 예배를 드리고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는 잡아함경에 있는 {云何大得}이라는 짧막한 경입니다,

  첫 회에 한 번 경 전문{全文}을 소개한 뒤로는 요점 만을 가려서 썼기 때문에 이번에 처음 읽는 분을 위해 원형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아주 짧은 경이지만 그 가운데에 천만 가지의 가르치심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선인이란 범어의 deva의 번역으로서 천신{天神}이라고도 합니다. 쓰기는 [천신]이라고 쓰지만 원뜻은 그 누구라고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지극히 선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그렇게 선한 사람이기에 밝고, 밝기에 빛이 있고, 빛이 있기에 어둠도 밝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 넓은 제타숲을 구석구석 까지 비출 만큼 밝음을 지닌 선인이 세존께 나아가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들의 삶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하찮은 미생물을 비롯한 동물로서는 먹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기본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먹지 못하면 생명 마저 끊어지게 되므로 [먹을 것] 이야말로 힘의 원천, 생명의 원천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우선 먹어야 하고 먹고 난 다음에는 입어야 하고, 추위와 더위를 막고 편히 쉬고 잠을 잘 일정한 공간이 필요합나다.

  이와 같이 의, 식, 주가 삶에 있어 기본적이고도 요긴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생, 로, 병, 사의 고해{苦海}에서 구제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이것들 때문에 인간은 더 큰 근심과 걱정, 그리고 깊은 탐욕의 늪으로 빠져들어 고통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먹고, 입고, 살 집이면 기본적인 모든 것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바른 법이야말로 감로]라고.

  감로란 Amrta라는 범어의 뜻을 따서 쓰는 한자 말입니다. 하늘 사람들의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로서 이 감로를 마시면 불로장생{不死}한다고 합니다.

  이런 뜻에서 불교에서는, 인간을 온갖 고뇌와 윤회에서 제도해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로법]이라고 합니다.

  굶주림은 우리의 육신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마음ㅡ이성과 양심ㅡ까지 마비시킵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을 사람 없다.] 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 가운데에는 넉넉히 먹고, 좋은 옷에 편안하고 좋은 집에 살면서도 굶주린 사람보다 더 마음이 흐려지고 마비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동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사나운 맹수들도 먹을 만큼 먹어서 배가 차면 더 이상 작은 동물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배가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거염을 부리고 더 가지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사치, 허영, 향락은 지극히 순간적인 것이며, 아무 이익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고통과 죄업의 씨앗{因}이 될 뿐입니다. 이 씨앗은 어김없이 열매{果}를 맺게 되며 그 열매의 맛은 쓰고 괴로우며 오래 갑니다.

  세존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길을 가시다가 산불을 만나 길이 막혀 잠시 발길을 멈추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하시었습니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계를 안 지키고, 계율을 어기고, 옳지 못한 행을 숨기고;,,,,,청정하지 않으면서 청정한 체하고, 마음은 썩고 욕심이 넘치는 사람은 차라리 저 불을 껴안아라. 여인을 껴안는 것보다 훨씬 낫다. 불을 껴안으면 죽든지 죽을 만큼 뜨겁고 괴롭겠지만 지옥에는 가지 않으리라.]

  이와 같은 지나친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 괴로움으로 마음이 병들어 마침내 양심은 마비되고 선후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사회윤리와 도덕을 짓밟는, 겉모습은 멀쩡한 사람의 탈을 쓴 동물 만도 못한 인수{人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바른 법을 일러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비이며 가장 큰 복을 누리게 해 주는 일이라고 거듭거듭 설하신 것입니다.

  한 선인이 세존께 여쭈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들이

  온갖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무엇을 벗으로 삼고

  무엇으로 길잡이로 삼아야 하며

  무엇을 아끼고 즐기리이까?

  세존께서는

  믿음을 벗으로 삼으라.

  지혜는 족히

  중생을 일깨워 주고

  이끌어 주리라.

  그래서 열반을 아끼고  즐기면

  온갖 고뇌에서 헤어나리라.

하시었다.

  믿음이란 불교를 이르심이니, 절에 가서 절이나 하고 복이나 빌며 입으로만 믿는 불교가 아니라 지극하게 믿되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맏음을 이르심입니다. 이 믿음과 실천은 참다운 참회와 발원 그리고  기도를 통해 굳어지며, 이런 삶은 바른 지혜를 낳게 합니다.

  바른 지혜가 없으면 세속적인 물질에 매달려 평생을 두고, 아니 몇 겁을 두고 고생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불을 껴안고 당장에는 육체적인 고통을 받더라도 영겁을 두고 죄값을 받을 인을 짓는 것보다는 낫다는세존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늘 이쪽과 저쪽, 이것과 저것, 이럴까? 저럴까?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갈림길에 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갈림길의 간격은 지극히 작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종이의 앞 뒤보다도 작은 간격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간격은 크게 벌어집니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가야 바른 길인가를 분별하는 지혜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 청소년들은, 이 갈림길에 설 때마다 얄팍한 사람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치심으로 모든 판단의 기준을 삼는다면 그 앞날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것이 퍽 바보스럽고 밑지는 것 같더라도 그 길만이 광명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1929년 서울 태생, 불교문서 포교회 대표, 젊은 부루나들의 모임 대표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