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다는 것의 참의미

남지심 연작소설

2007-10-12     관리자

“얘 숙희가 폐암이라는 소식 들었어?”
진영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영숙이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쳐다봤다.
“숙희가 폐암이래.”
진영이가 더욱 조심스럽게 자신의 말을 좌중에 확인시켰다.
“어머 말도 안 되는 소리. 3일전에도 나하고 통화했는데. 쌀사가라고...”
경옥이가 펄쩍 뛰며 진영이 말을 반박했다.
“어저께 안 사실이야. 얼마전에 영순이하고 같이 가서 종합검진을 했었나봐. 그런데 폐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대.”
“설마 걔한테는 전혀 병색이 없었잖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했어.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노상 기침을 하고 다녔잖어.”
“맞어. 그랬어.”
“폐암이 제일 나쁘다던데. 그게 정말이면 어떡하니?”
“고3짜리 딸도 있잖어. 시험이 한달 밖에 안 남았는데.”
“기가 막히다 얘. 사는 게 어쩌면 이렇게 허무하니.”
여기 저기서 한마디씩 튀어나왔다.
강여사는 머리가 띵해지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들 말을 듣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옥이처럼 강여사도 3일전에 숙희하고 통화를 했었다. 그것도 건강에 좋다는 현미쌀을 갖다 먹으라는 말로.
그런데 그 숙희가 폐암이라니, 하늘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더니 하늘이 시샘을 했는가 보다.”
“얜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하늘이 무슨 시샘을 하니.”
강여사는 친구들 말을 들으며 3일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침 청소를 끝낸 강여사는 머리를 감고 있을 때 전화벨이 계속 울려 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눗물이 흐르는 머리를 타올로 감고 전화기 앞으로 나와서 “여보세요”하며 수화기를 든 순간
“집에 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안 받니?”
숙희의 총알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머리감고 있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 있니?”
“무슨 일보다 양주에서 쌀이 왔는데 너도 몇 가마 들여 놓으라고.”
“글쎄...”
강여사는 목뒤로 흐르는 물을 타올로 닦으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얘는 글쎄가 뭐니. 지금 그 쌀 서로 가져갈려고 난리야. 맘먹고 줄려는데 단소리 말고 어서 와서 가져가.”
“생각좀 해보고.”
“아유 답답해 얘. 생각할 게 뭐가 있니?”
“알았어. 머리 마저 감고 내가 전화할게.”
“그래. 빨리 전화해.”
숙희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기막힌 배려를 배려로 받아들이지 않는 강여사가 괘씸하도록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놓고 세면기 앞으로 다시 돌아온 강여사는 비눗물이 흐르는 머리를 몇 번 헹궈서 감고 새 타올로 머리를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와서는 강여사는 숙희한테 바로 전화를 하지 못하고 화분도 들여다보고 가구위에 있는 먼지도 털고 하면서 서성였다. 그러고 있는 그녀 가슴속에선 두 가지 생각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냥 숙희 하자는 대로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우스운 일이야.
갈등을 빚고 있던 강여사는 마침내 한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전화다이얼을 돌렸다.
“나야.”
“이제 생각 다했어?”
숙희가 비알밭 매는 소리로 물었다.
“응”
“어떻게 할거야? 다섯 가마만 할래?”
“아니 난 한가마도 안할래.”
“기가 막혀서. 얘 공자님도 시속따르며 살으라고 했어. 너 혼자 왜 그러니?”
“고마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알았어. 혼자 마음 편하게 살어.”
숙희는 이렇게 비꼬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강여사는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잠시 갈등을 빚긴 했지만 역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옳았는지 안 옳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공해문제가 생존을 위협하자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혹은 가족을 공해로부터 탈출시킬 수 있는가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음식물은 건강과 직결되고 있으므로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들로서는 음식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강여사 주변에서도 생수를 사서 식수로 사용하는 집이 늘게 되었고 무공해 식품을 하나라도 더 구입할려고 안간힘을 쓰는 친구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숙희는 그런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학교 때도 숙희는 똑똑하고도 똑똑한 애중의 하나였다. 경우 바르고 이해타산 바르고 사리분별 바르고... 어수룩한데라고는 한군데도 없는 그런 아이였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5,6년 정도 지나자 주위 친구들은 마치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처럼 모두 결혼들을 해 떠나갔다.
죽기 살기로 연애를 했던 친구도 막상 결혼 상대는 엉뚱한 남자인 경우가 종종 있어서 ‘누구누구는 어떠어떠한 사람한테 시집을 갔데’ 하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럴 무렵 숙희의 결혼은 그야말로 화제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그녀는 경기고등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법대를 일등으로 입학하여, 서울법대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일등으로 합격한 전도가 창창한 일등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결혼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역시 숙희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 후 20여년동안 숙희는 남편이 부장판사가 되도록 내조를 했고 아들도 아버지 뒤를 이어 서울법대에 합격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그녀 자신이 일등 현모양처 자리를 굳혀 갔던 것이다.
강여사는 그런 숙희를 볼 때마다 역시 숙희구나 하는 20여년전 감탄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감탄일 뿐 부러움은 아니었다.
부러움이란 관심이 같을 때 생기는 법인데 강여사로서는 애시당초 그녀하고는 같은 관심거리를 가질 게 없어서였다.
서울에서 생수라는 것을 파는 지조차 모르고 있던 강여사한테 최초로 생수를 사먹으라고 권유한 친구도 숙희였었다. 어느 날 그녀는 강여사를 찾아와 자신의 현명함을 십분 강조시키다가
“우리 인체가 80% 수분으로 되어 있다는 거 너도 알지. 그러니까 물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하겠니. 가족들한테 한강물 먹인다는 건 말도 안돼. 너도 눈딱감고 생수 사먹어.”
숙희는 같은 말을 몇 번 강조해서 하고는 돌아갔다. 10년전 쯤인듯 싶다.
하지만 강여사는 지금까지 그 일을 실천에 옮기지 않고 있었다.
요즈음은 처음 그 말을 들을 때하고는 상황이 달라서 생수를 사먹는 집이 부쩍 늘고 있다.
한강물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가가 신문에 보도 될 때마다 강여사도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갈등이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막상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강물이 아무리 오염돼 있다 해도 서울 시민의 대부분은 아직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강여사도 그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끼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염치고 염치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숙희는 비료를 주지 않은 고추니 사라고 권하기도 하고 무공해 배추를 구해서 김장을 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여사는 같은 이유로 그녀의 권유를 물리쳐왔다.
그러던 숙희는 몇 년 전부터 양주에다가 아예 농장을 하나 장만하고는 배추 고추는 물론이고 파 들깨잎까지 날라다 먹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무공해 현미쌀을 가져와서 친하다고 생각되는 친구한테 연락해 사가도록 권유했다.
강여사는 숙희의 그런 권유를 받을 때마다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그녀의 줄기찬 생명력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두손을 들고 항복하고 싶은 기분하고도 비슷했다.
“우리도 조심하자. 언제 무슨 병이 걸릴지 모르잖어.”
“그게 뭐 조심한다고 되는 일이니 숙희 봐라.”
숙희 얘기가 나오자 친구들은 모두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여사도 따라 일어났다.
“넌 내 차 타고 가.”
경옥이가 옆에 와 서며 말했다. 집방향이 같기 때문에 친구들과 만나는 날은 경옥이가 늘 집까지 데려다 주곤 했었다.
“아니야, 오늘은 너 혼자 가. 난 좀 들릴데가 있어서.”
“어딘데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럴 필요없어. 그냥 택시타고 갈게.”
“그럼 다시 연락하자.”
친구들은 우울한 얼굴로 뿔뿔이 헤어졌다.
숙희한테 가서 현미쌀 한가마만 달라고 할까?
거리로 나온 강여사는 숙희네 집을 방문할 구실을 마음속으로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은 숙희네가 있는 영동쪽과는 정반대인 조계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숙희의 똑똑함은 저승에 가서도 그대로 통할까? 이런 생각을 해보던 강여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강여사는 몸도 마음도 다 추워져서 바바리 깃을 세우고 인파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상의 똑똑함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