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라 불상

불교미술의 이해 7

2007-10-12     관리자


간다라와 마투라가 인도 초기 불교미술의 중심지이지만, 이 양대지역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인도 동남부의 안드라(Andhra) 지역이다. 안드라는 데칸 동남부의 고다바리(Godavari) 강과 크리쉬나(Krsna) 강 중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아마라바티(Amaravati)와 나가르주나 콘다(Nagarjuna-Konda)를 비롯한 불교문화의 유적지가 많다.

대승불교 성립에 선구였던 대중부(大衆部)가 정착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처음 만들었던 곳도 이 지방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하는 주장을 불교학자들은 하기도 한다.
안드라 푸라데슈주의 동쪽을 흐르는 크리쉬나강을 따라가면 남쪽 언덕에 아미라바티의 유적지가 있다. 이 지역은 마투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전통에 훨씬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또한 크리쉬나강과 인접한 지형적인 혜택으로 안드라 지방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으며, 뿐만 아니라 아쇼카대왕의 소마애(小磨崖) 비문 및 석수(石樹) 비문도 남아있다. 아마라바티의 불교쇠퇴는 서기 3세기 초부터 급격히 시작되었지만 불교 건축과 조각 등 조형미술활동은 이곳에서 110Km 떨어진 서쪽의 나가르주나 콘다로 옮겨져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나가르주나 콘다는 동쪽과 남쪽이 산으로 둘러 싸이고 북쪽과 서쪽에 크리쉬나 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크쉬바쿠(IKSvaku) 왕가는 이곳에 비자야푸리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왕가는 대대로 힌두교도이지만, 왕가의 여성들은 불탑 및 승원 등 불교상가에 아낌없는 보시를 했다. 대승불교 흥기 속에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nika)의 시조이며 8종(宗)의 개조(開祖)라 일컫는 나가르주나(Nagajuna: 龍樹)가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고 전한다. 나가르주나 콘다의 흥망은 이크쉬바쿠왕가의 흥기와 더불어 번성했고, 4세기 중엽 멸망과 더불어 쇠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5세기 이후의 유적과 비문, 불상 등이 출토되지 않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그 후 안드라지역에는 여러 왕조가 바뀌면서 영욕을 거듭하지만, 아마라바티의 불교는 그 후 오랫동안 잔존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639년 현장스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아마라바티는 대승불교의 중심지로서 무수한 승원의 폐허 위에 20여개의 승원에 천여 명의 대승비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나가르주나 콘다의 유적은 번호가 붙여진 것만 130개에 달하는데 1969년 댐의 완공으로 그 중 10여개의 불교 힌두교 유적만 안전지대로 이전시켜 놓고 나머지 대부분이 수몰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침몰되었다고 한다. (모형을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대부분의 고대 유적이 그러하지만 상상 속으로 복원해 볼 수밖에 없는 상상의 가람으로 가슴속에 형상화 시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안드라지역에 널리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 지역 자체가 얼마 후 남인도 불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타밀 지방과 스리랑카, 말레이 반도, 미얀마 등 동남아 지역으로 발전하는 불교의 한 거점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서데칸 지방과 마찬가지로 서력 기원 후의 2~3백년간 서방세계 (Rome 중심)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해상무역을 하였으며 국내 상공업의 활성화와 더불어 고다바리강, 크리쉬나강을 중심으로 연변에 무역도시가 번영하였다. 이 무역도시를 중심으로 불교도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유적은 대부분 불탑(Stupa)과 정사(Vihara;승원굴)의 유적이 남아있는데, 서데칸과 달리 대부분 지상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이곳 산들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석굴의 개착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탑조성과 그에 따른 건물-예배당, 요사채 등 기타 시설의 조성에 왕가와 여러 호족, 상인 등 지배계층의 아낌없는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당시 불교에 대한 열정과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이곳 안드라 불탑들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라바티의 대탑으로 직경이 50여m이고, 바티푸트르탑은 45m, 나가르주나 콘다탑은 45m이며 간타살라탑은 35m, 자가야페타 탑도 19m에 이르는 대탑(大塔)들이다. 이들 탑 중에서 아마라바티 대탑의 건립은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나 대부분은 그 후대에 건립된 것이다.
안드라지역의 북부에는 쿠샨(Kusana) 제국과 샤타바하나(Satavahana) 왕조의 통치를 받은 후기 안드라 제국이 동시대에 존재했다. 안드라제국은 인도의 동서해안에 가로놓여 있어 제국의 항구들이 서방세계(로마)와 활발한 교역을 했었다. 이 시기에 불교는 빠른 속도로 인도 전역에 전파되어 기원전 3세기에는 안드라 지역까지 전래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의 해외 전파가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석존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형상화한 불교 미술품이 포함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 콘다를 중심으로 하는 안드라 지방에 불상이 출현하고 난 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경과하지 않을 때였다. 서기 1세기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불탑을 중심으로 한 신앙집단이 불교 개혁운동을 담당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그 중심될 계층들은 역시 부파불교에 소속되지 않은 불탑신앙 집단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자성설(自性說)을 철저하게 논박하여 진실의 실상을 드러내는 일(顯正) 즉 파사하는 일이 대승불교의 중심인 공(空:Sunya) 사상인 것이다. 대승 흥기의 발상지로 지금까지 안드라 지방을 추정하는데 이것은 공사상(空思想)이 안드라에서 발생하여 성립되었을 가능성은, 더욱이 나가르주나가 만년을 이곳에서 보냈다면 더욱 높기 때문일 것이다.

안드라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
2세기, 3세기 동안 거의 같은 시기에 아마라바티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초기 불상양식이 발달했다. 좌상 또는 입상으로 제작된 아마라바티 불상은 간다라불의 영향으로 변화되어 마투라불과 아주 유사성을 갖고 있다. 특히 장중한 신체에서 럭비 선수를 보는 듯한 아주 건강하고, 힘있는 느낌을 갖는다. 잔뜩 벌어진 어깨는 과장된 듯하게 거대하게 느껴지고, 모습 또한 건장한 청년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우아하고, 고른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린 긴 법의의 처리에서도 간다라불과 마투라불의 양면성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마투라불을 연상시킬 정도로 눈은 가장자리가 약간 볼륨감을 갖고 있고, 코와 입술은 두툼하며, 머리에는 육계가 나타나 있다. 헤어스타일은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의 회문(廻紋) 즉 소라 고동처럼 굵게 처리하였는데 후일 간다라불과 마투라불의 헤어스타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들을 하고 있다. 나선형으로 소용돌이 치는 머리카락 형식은 불상의 특상관(特相觀) 32상 80종호에 나선형 머리카락(一一毛 一一毛者 身一毛生 色若紺靑 如螺右旋)이 들어있는데 이를 충실히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아마라바티는 마투라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안드라파로서 독자적인 전통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나발(螺髮)의 표현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안드라불상은 법의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께를 터놓고 있는 모습과 두터운 옷감 그리고 깊이 새겨진 주름골은 간다라와 마투라의 혼합적인 모습을 느끼게 한다. 즉 우견편단의 형식으로 법의를 입었지만 마투라불처럼 신체 굴곡에 밀착된 모습이 아니며 간다라불처럼 요철(凹凸)이 심한 편도 아닌 두터운 옷이지만 주름은 선으로 깊게 새겨진 상태이다.
서력 기원 초기이내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로마와 교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로마 미술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데, 이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와 접하면 그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미술에도 미묘하게 반영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라바티는 마투라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전통을 발전시켜 간다라, 마투라 나란히 고대 인도불교미술의 한 바탕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에 안드라불상이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불상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佛光

이성도--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한국미술협 회, 서울조각회, 마루조각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