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

테마 에세이/작은 것에도 소중함을

2007-10-12     관리자


한 때 나는 베고니아를 키웠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없이 물을 주어본 것뿐인데 놀랍게도 시들어 다 죽어가던 잎사귀와 꽃잎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 바람에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과 빛살이 잘 섞인 곳에 놓아두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챙겨 주었더니 근심없이 잘 자라주는 것이었다. 자고나면 여기저기에 꽃봉오리가 터져 있고 보니 매일 아침 나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조그만 꽃잎들이 내게는 새의 무궁무진한 날개처럼 크게 보이곤 하였는데 조그만 생명의 정직함이 그 해 여름 내내 나의 심금을 울렸다. 한줌의 햇살과 물이, 죽어 가던 베고니아에게는 생명의 전부였던 것이다.
작년 초가을에 인쇄소에 가다가 그 해의 첫 코스모스를 보았다.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분홍색 꽃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왼쪽 가슴에 꽂았다가 볼일을 보고는 돌아오는 길에 손바닥에 놓고보니 코스모스는 그러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꺾여진 목에서부터 새까맣게 타들어간 것이 고통스러워 보였고, 그 코스모스는 내 손바닥 위에서 참화를 입은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작은 꽃을 무심코 해쳤던 것이다. 그 주검을 고이 갖고 와서 열반경의 한 페이지에 끼워두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작은 꽃 한송이의 편안한 안식처로 열반경을 택했던 것 같다.
어느날 문득 열반경을 펼치다가 잘 마른 코스모스 꽃 한 송이를 만났다. 곤충의 날개처럼 투명해 보이는 것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이 위안은 코스모스의 구제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인 것 같았다. 기실은 내 행위에 대한 내 자신의 용서였다.
베고니아를 살려냈으면서도 길에 핀 코스모스 한 송이에는 미처 생명의 외경스러움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성정의 거치름 탓이었다.
살아오면서 조그만 것이나 작은 일에는 무디어지게 되었다. 내 손에 꺾인 코스모스 한 송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무디어지고 거칠어진 인성(人性)의 각성이었다. 큰 깨우침이 아닐 수 없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 ‘용의 눈’에서 사샤 왕비는 그녀의 어린 아들 피터에게 식탁에서는 꼭 냅킨을 사용할 것을 가르치면서 인간의 본성에는 ‘신(God)’과 '개(Dog)'가 동시에 들어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서로 역순으로 놓여 있다. 식탁에서 냅킨을 사용하는 사소한 예의범절이 훗날 그녀의 아들인 피터 왕자로 하여금 조그만 일에도 정의롭고 성실한 태도로 임하게 하고 있다.
피터 왕자는 사샤 왕비에게서 정도(正道)란 무엇이며, 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사소한 규범에서부터 배웠던 것이다. 인간은 신성(神性)과 견성(犬性)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샤의 말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언제나 견제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고,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해야 하는 ‘인간의 길’은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샤가 가르친 냅킨 사용의 실제적 이유이다. 이 가르침은 베고니아를 다시 꽃피우게 했던 한줌의 햇살과 물같은 것이었다.
믿음도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태산을 옮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겨자씨만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살면서 하찮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무관심해서 지나쳐버린 것들이 때로는 우리를 후회하게 하고,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절망시키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마는 다시 또 되풀이하는 것처럼 하물며 마음을 지키는 믿음에 있어서랴. 더욱이 작은 것은 단단해서 쉽게 깨어지지 않으며 또한 무한히 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튼튼하고 커다란 믿음인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의 경계란 그러므로 우리의 미숙한 자(尺)일 뿐이며, 자는 곧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진리의 자는 크고 작음을 견주지 않는다.

박진숙 시인, 서울 출생, 81 월간 문학 시당선, 시집 다른 새들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