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불자를 기약하며

권두수상

2007-10-12     관리자


인간경시의 살벌함과 물질만능의 염오(厭惡)함이 시대풍조의 당위적 추이를 지나쳐 홀연 추악해져 가는 탓인지, 나는 요즘 들어 진실의 본간에 기댈 수 있는 신심(信心)을 그리워 할 때가 많다.
인성(人性)의 폭이 열졸하고 사유의 깊이가 여틈해서 신심을 우러낼 동기마저 느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별난 변화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심정의 까닭을 숙고하는 바, 그것은 첫째가 외로움이요, 둘째가 존명의 의미마저 상실케 하는 사회적 황폐에다 끈을 댐을 알았다.
금년 정초, 그 숙연한 서설(瑞雪)이 선백의 운하(運河)처럼 욕계를 덮던 날, ‘눈보라의 運河’라는 글머리로 당신의 생애를 엮으셨던 모친께서 86세의 세화를 마감하셨다.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명각의 제 정신을 지탱할 수 없는 혼각과 울혈낭자한 비감의 어질머리로 ‘외로움’을 싸바르며 살고 있다. 세상이치로도 그만하면 천수요, 상정의 눈으로 봐도 호상(好喪)임에 어김없으련만 이처럼 무작스러움에 버금가는 외로움을 키우는 뜻인즉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의 그 절절한 ‘피’를 염모하는 탓이다. 그러나 이 ‘외로움’ 역시 중생(衆生)의 한량없는 탐(貪)이라 자책하는 날이 있을 것이요, 그 각성의 정연한 뜻을 일깨우는 웅혼불멸의 진실이 신심 속에 있다면, 나는 그 신앙의 진지한 맨살이 되어 여생을 바치고 싶은 것이다.
이 천륜의 애절한 외로움을 이겨냈다고 했을 때, 나는 불행히도 또다시 사회적 황폐의 그 탄탄한 모순과 부정의 ‘새로운 비감’과 맞서야 할 소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 죽을 때 까지는 문학을 해야 하는, 어쩌면 영원히 기구(崎嶇)한 격고명금(擊鼓鳴金)의 그 참담한 싸움을 자청(自請)해버린 운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김없이 앓아야 하는 ‘외로움’은 차치한다 쳐도, 모순과 부정과 비리의 폭압을 발그집어 진실이 되게 애쓰는 ‘문학의 소명감’은 가히 신앙의 고해(苦海)에 견주어 틀릴 바 없겠고 이같은 구언의 고험함에 진력하는 신행(信行) 또한 육즙을 짜대는 창작의 통난함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연유에서 불쑥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신앙을 갖는다면 어떤 신앙을 택할 것인가’ 혹자는 나의 이런 생각을 두고 힐난할는지 모른다. 무릇 신심이라는 것이 무작정 ‘믿고 보는’ 마음일진대 신앙이 무슨 ‘과학’이라고 실효와 이해의 적성 테스트를 거쳐 택해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이러한 힐난 속에는 우려할만한 ‘무지’ 역시 담겨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우주적 섭리에 순응하고 조화되는 인간 심성(心性)의 다별함이 무극(無極)이듯이, 신앙 또한 인간사유의 무량한 적성을 친화의 동화력(同化力)으로 포용하는 아량으로써 신심을 얻어내야 한다. 이와 같은 평범한 섭리를 역행하며 무조건 ‘믿어보고’ 무작정 ‘믿으라’ 했을 때 신앙과 신도의 본질적 위화(違和)를 부르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목회자 같은 않은 목사’ ‘기독교 신자 같지 않은 신도’ ‘중 같지 않은 스님’ ‘불자 같지 않은 불교신도’가 있음이 바로 이런 까닭인 것이다.
신심(信心)은 곧 인간 심성(心性)이라, 신앙의 천연한 본간을 이쯤 세울 때, 나에게는 아무래도 불교가 내 천성에 걸맞을 것 같다.
그런데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내 속진의 인연으로 더러 더러 얼굴을 마주 대하는 스님(?)이나 불자(佛者)들 중에, 의당 불심(佛心)을 버려야 마땅할 사람이 몇몇 있어 안타깝다.
사바(娑婆)의 시러배나 할 짓인 명리(名利)의 탐욕에 찌들어 승랍의 과정을 온통 과시적, 화문(花紋)으로 싸바르는 행태며, 괴기한 망동으로 한사코 불도를 어겨가며 파계(破戒)의 퇴폐적 결과로써 세정의 인기(人氣)를 노리는 자, 더불어 황금의 실리에 눈이 멀어 속세의 졸부들과 장두상련(腸肚相連)의 끈을 맺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법어(法語)를 빙자하며 중생의 말초감각대를 건드리는 악서(惡書) 출판의 명수에다, 난세의 민간질고(民間疾苦)는 모른다 하며 되려 모순과 폭압의 권력에 연착하여 신심의 도피안(逃避案)을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과연 불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막심한 우려와 엄밀한 자성(自省)이 따른다. 어떤 신앙의 교리도 마찬가지이겠으되, 특히 불교의 진리는 깨우치면 ‘평범한 인간의 도리’요, 그릇 알면 세상 한번 얼렁쇠 수작으로 살기에 편한 ‘속계의 약방문’이다. 구원의 진리가, 그 가르침이, 어떤 종교보다 만유중생에게 골고루 미치는 택피창생(澤被蒼生)의 포용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민주화 민주화 해대며 경토의 골골샅샅까지 열풍이 불되 진지한 실득과 전민족적 개명(開明)은 아직도 까마득히 멀다. 부(富)의 막강한 탄성 밑에 작신작신 밟히는 육탈골립(肉脫骨立)의 가난은 지금도 울혈낭자하고, 또 어느 때 다시 창궐할 지 모를 모순의 잠재력은 상기도 표리상응(表裏相應)하며 그 본색을 감추고 있다.
나는 그 어느 날 불현듯 불자가 되고 싶다. 이러한 소망으로 불자들에게 바라고 싶다. 허황한 명성과 비범한 몽상(夢想), 그리고 세강말속(世降末俗)의 뒷전에서 종교적 안위로 정좌관심 하는, 이 모든 ‘비범(非凡)’보다 중생의 혈한 속에 섞이는 ‘평범’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승찬대사(僧澯大師)의 ‘신심명(信心銘)’ 중 설법한 구절을 외우며 내일의 불자를 기약한다. “틀에 박힌 짓은 잘 된 것이라 할 수 없고, 바다를 지고 산을 드는 것도 힘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이 사십년간 설법한 것은 손이 있으나 허공을 잡기에 알맞고, 백염적(白염賊) 천 칠백 명의 입이 있으나 오직 입을 벽에 걸 만하다. 가장 잘 드러난 것일수록 알기 어려우니 설사 분명하게 들어보이려 하더라도 이것은 벌써 문 앞에 가시밭이다.”

천승세 소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심의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