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無所有)

서경수 칼럼

2007-10-11     관리자

   옛날 마가다의 서울 왕사성 성문을 들어설 때 겪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흰 수염으로 얼굴을 가린 전라(全裸)의 늙은 도인(道人)이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고 성 밖에서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인도에 오래 살았던 경험에서, 그가 지나교의 도인임을 알아 차렸다. 얼른 합장하고 예배하니, 도인도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응대해 주었다. 그래서 얼른 허술한 거리의 찻집으로 인도하여, 함께 인도 차를 마실 기회를 가졌다. 천진한 아이처럼 항시 미소를 잃지 않는 나체 도인은 서투른 영어로 자기소개를 한다. 그는 봄베이 근처에 있는 다감바라파 지나교 사원의 주지로 있는데, 성지 참배차 왕사성까지 왔다는 것이다.
   왕사성은 지나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법화경을 설법한 영취산(靈鷲山)과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竹林精舍)도 왕사성에 있다. 한참 이야기 하다가, 나는 문득 그 도인에게
  『이같이 홀랑 벗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단도직입적 질문이었으나 그 도인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내 옷 소매를 잡으면서 나에게
  『태어날 때 이 옷을 입고 나왔느냐.』고 반문했다.
   그래서『나도 홀랑 벗은 채로 태어났다.』고 대답하니,
  『바로 태어난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 까지도 홀랑 벗은 나체대로 살아간다.』
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어서 다음 말이 감명 깊었다.
  「홀랑 벗고 살아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옷이 필요 없으니 빨래할 걱정이 없고, 물건을 넣어 둘 호주머니가 없으니 무소유(無所有) 계율이 저절로 지켜진다는 것, 누가 무엇을 주더라도 받을 수 없는 것이 나체 도인이다. 넣어서 감추어 둘 안 호주머니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고 눈여겨보니, 도인은 오늘 중으로 파드나까지 가서 밤기차를 타야 하므로 서둘러야 한다고 한 마디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불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생겨난 종교가 <지나교>다. 지나교의 창시자는 마하 비라라는 성인이었었다.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과 같은 시기에 생존했고, 같은 지역에서 포교했으므로 어느 서양 학자는 부처님과 마하 비라를 동일 인물로 추론하기 까지 한 적이 있었다.
   계율에서도「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등 네 가지 계율은 불교나 지나교가 공통되고, 다섯 번째「술마시지말라.」가 지나교에서는「무소유」로 바뀌었다.
   마하 비라는 12년 동안 고행할 때 입던 옷이 다 닳아서 없어졌으나 없는 나체 그대로 고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지나교의 정통파인 디감바라파 승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완전 나체로 거리를 활보한다. 디감바라의 뜻은 <허공의 옷>이란 말이라 한다. 허공이란 옷을 이미 입고 있으므로 또 옷을 겹으로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나교의 승려는 철저한 청빈(淸貧)을 지켜간다. 모든 소유를 부정하므로 청빈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지나교 승단의 이 같은 철저한 청빈정신이 불교가 없어진 인도 사회에 지나교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나교 승단이 물질적 부패 때문에 타락하여 붕괴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다른 종단에 비하여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런데 지나교단은 물질적 조건 때문에 부패할 소지는 가지고 있었다. 인도 사회에서 <불살생>계율을 가장 엄격하게 고수한 종교는 지나교다. 그들은 오늘 까지도 채식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지나교의 신도는 반드시 자기의 성에 지나 즉 <제인>을 붙인다. 그래서 제인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지나교 신도이다. 그들은 불살생 계율을 고수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얼음까지도 먹지 않는다. 얼음 속에는 얼어서 죽은 벌레가 있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그래서 지나교에서는 옛날부터 승려 뿐 아니라 일반신도까지도 농사에 종사할 수 없게 계율이 금하고 있다. 농사를 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벌레를 죽이게 된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일반신도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봄베이 북쪽의 상업시장은 지나교도가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지나교 신도들 가운데는 부자가 많다.
   신도들 가운데 부자가 많으면 지나교 사원도 그만큼 물질적으로 풍부할 수 있다. 사실 지나교단은 타 종교의 교단에 비하여 물질적으로 풍부하다. 교단이 여러 가지 문화사업과 사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나교단이 물질적으로 부패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신문기사도 읽어 본 일이 없고,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인도의 성인인 마하트마 간디의 무소유 계율에 근거한 청빈도 철저했다. 그의 청빈정신은 지나교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와 함께 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청빈의 덕을 강조하면서 최저의 생활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가 맡은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쳤다.
   간디 자신, 항상 가난한 인도 사람이 타는 삼등차로 여행하고, 시골에 가면, 가장 가난한 농민의 집에서 농민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잤다.
   그는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가 가장 순수하고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자신도 반라(半裸)의 모습을 하고 영국 왕한테까지 알현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홀랑 벗고 태어난 모습 즉 무소유의 모습이 하늘이 그에게 준 진실된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물질적 축재를 한다거나 축재한 재산을 해외로 반출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의 말대로 성인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며, 출가 승려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평범한 서민 중의 서민이었다.
   다만, 태어난 그대로의 청빈을 하늘이 준 것으로 믿고 살다 간 사람이었다. 그가 전 인도적 규모의 반영저항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과정에는, 민족 재벌들의 적극적 희사와 기부도 막대했다. 물론 가난한 서민들의 가냘픈 희사도 있었다. 청빈을 그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간디는 한 푼의 금전도 <사적으로 유용>하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하도 목이 말라 얼음물 한 컵을 공금으로 사서 먹었다 하여 그 젊은이를 심하게 책망한 후, 그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모든 물질적인 것은 금전까지도 포함하여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혜택으로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하늘이 준 혜택은 하늘을 대신하여 사회를 향하여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한 푼도 남김없이 하늘이 그에게 준 그대로를 남과 사회에 주어야 한다. 그의 소유가 있을 리 없다. 철저한 무소유다.
   거액의 황금을 해외로 밀반출 하려다가 세관에 걸린 어느 명문 기독교 교회의 유명 목사가 있었다. 그는 밀반출 하려한 거액은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거액의 황금은 하나님이 그에게 내려준 은혜로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거액의 황금을 다른 나라로 밀반출하라고 내려준 은혜는 아닐 줄 안다.
   이 나라에서,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하여 하나님 대신 정의로운 방법으로 써 줄 것을 하나님은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사는 끝내 그 황금은 자기 소유라고 우기고 있다. 그는 황금을 위하여 황금의 노예로 그의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그는 하나님 보다, 또 그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우는 예수님보다 황금을 더 소중히 섬기고 신앙했던 목사였다. 무엇인가 본말(本末)이 전도된 기분이다.
   그 목사는 한 번쯤 인도 지나교의 무소유정신을 공부했으면 하고 바라고 싶다. 그리고 간디의 철저한 청빈정신도 본받아 주었으면 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구원은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부자의 천국행을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목사는 황금만능에 도취하여 황금이 많을수록 천국행은 그만큼 쉽다고 잘못 믿었다. 그런데 이 같은 잘못은 비단 그 유명 목사 한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