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등불

생활인의 불교신앙

2007-10-11     관리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너희들은 저마다 자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自燈明).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 하여라(法燈明)’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자기자신’이란 모든 사란이 지닌 부처님 성품<佛性>으로서 모든 것을 다 갖춘 <能含萬法>지혜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여석 개의 창문<六根>을 통해 세상과 접하면서 좋고 싫은 구별을 짓고 좋으면 끌어당기고 싫으면 밀쳐 낸다. 이러한 애증이 반복되고 서로 얽히면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그물이 나를 옭아매 버린다. 마치 누에가 제가 내뿜은 실에 갇혀버리는 것과 같다.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될까?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이 세 가지 해로운 마음<三毒心>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다. 즉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 하고<貪心>, 서로 대립하여 화를 내며<瞋心>, 고정하여 변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해로운 마음은 <나>라는 고집이 잇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나>라는 말이나 생각을 별 깊이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괴롭고,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지 못하면 괴로우며 쾌락을 얻어도 뒷맛은 항상 쓰다<苦>. 또 일체의 사물들은 여러 가지 성분이 모여서 된 것이니 역시 빈 것이 된다<空>. 또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여 버리니 항상한 것이 없고<無常>,따라서 나의 소유물이나 <나>라는 것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변하여지고 스러져 버리는 것이니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다<無我>.
이렇게 부처님 말씀<佛經>에 의해 들은 바를 알게 되고<聞慧>, 생각하여 알게 되어<思慧>분석적인 방법으로 공(空)을 알 수 있다<析空>. 그러나 쌀밥을 아는 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고 먹어야 배가 부른 것처럼 공을 아는 것만으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생사윤회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고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공(空)을 닦아서 알고<修慧> 공을 체험<體空>해야 한다.

수레바퀴를 만들 때 나무바퀴가 너무 크면 쇠테 속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 바퀴가 너무 작으면 헐거워서 쇠테에서 빠져버린다. 그러므로 좋은 수레바퀴가 되려면 쇠테 속에 들어갈 정도로 나무바퀴가 작아야 되고 헐거워 빠지지 않을 정도로 나무 바퀴가 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바퀴를 잘 깍아 훌륭한 수레바퀴를 만드는 것은 오랜 체험과 노력으로 숙련된 장인 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의지 할 바인 반야지혜의 등불은 공을 체험한 후에만 드러난다. 반야(般若)는 일체의 허망함을 여의고 우리들에게 본래 갖추어진 증(證)할 바인 이체(理體)를 가리키는 실상반야(實相般若), 실상을 비추어 보는 참지혜인 관조반야(觀照般若), 모든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인 방편반야(方便般若 또는 文字般若) 등 3반야가 있다. 또 반야지혜의 대상이 되는 일체만물을 경계반야(境界般若)라 하고 모든 단계의 지혜들을 통틀어 권속반야(眷屬般若)라고 하여 이 둘을 포함하여 5종 반야(五種般若)라고도 한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번뇌가 들끓는 어두운 지혜의 등불을 항상 밝히라>고 말씀하셨다. 지혜는 탐착을 없애고 생 노 병 사의 바다를 건너는 튼튼한 배이며, 무명(無明)속의 밝은 등불이며, 병든 자의 약이며 번뇌의 나무를 찍는 날이 예리한 도끼라고 유교경(遺敎經)에 쓰여 있다. 또 밀린다왕문경(王問經)에서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에게 지혜의 특질을 묻는 부분이 있다.
밀린다: 스님, 지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나가세나: 지혜는 광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밀린다: 지혜의 특징은 어찌하여 광명이 됩니까?
나가세나: 지혜가 생길 때 지혜는 무명의 어둠을 깨뜨려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심오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출가수행자는 모든 것을<무상이다, 고다, 무아다>라는 밝은 지혜로 보려고 합니다.
밀린다: 비유를 들어 말해 주십시오.
나가세나: 어떤 사람이 어두운 집안에 등불을 가지고 들어오면 어둠을 깨고 광채를 발하며 밝은 빛을 비추어 거기 있는 물건들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가장 밝은 지혜로써 모든 존재를 바로 비추어 봅니다.
밀린다: 잘 알았습니다.
위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지혜는 결국 <나>의 허망함과 우주만물의 공함을 바로 봄으로써 모든 번뇌가 붙을 자리를 없애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번뇌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른 견해만 가지면 등불에 어둠이 밀려나듯이 번뇌는 저절로 지혜 앞에 소멸 되는 것이다.
9월 중순에 일만 개의 등불을 밝히는 만등불사(萬燈佛事)에 동참한 일이 있었다. 저녁에 7시에 축원과 더불어 1만 2천개의 등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각각 촛불을 들고 수십 내지 수백 개의 등에 불을 붙였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주변에 캄캄함이 짙어질수록 등불의 밝기는 더욱 상대적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堤心)이 확고한 분들(正定聚)이 이 자리에 모였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향상할 가능성과 타락할 가능성이 반반인 분들(不定聚)과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로의 타락의 길로 치닫는 중생들(邪定聚)이 모두 등불을 켜는 공덕으로 밝은 지혜를 밝혀 번뇌와 속박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한 등 한 등 불을 붙여 나갔다.
중생이 있으므로 보살이 있고, 번뇌가 있으므로 보리가 있듯이, 어둠이 밀려오므로 등불은 밝게 빛날 수가 있다. 불자(佛子) 개개인이 부처님의 밝은 지혜의 등불에 점화(點火)되어 또 다른 박은 등불로 타오르고 아직 점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점화시켜 간다면 어두운 세상이 밝아 질 것이다. 시공이 제약을 받고 생사의 바다에서 헤매는 우리들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진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은 빛에 직접 점화(點火)될 만한 그릇이 못되지만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을 계속 이어 온 눈 밝은 큰 스님들의 위덕에 힘입어 밝은 등불로 점화될 수 있을 것이다.

혜능 스님께서 <정(定)과 혜(慧)는 등(燈)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본래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라고 하셨다. 즉 정(定)은 혜(慧)의 본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라 밝은 지혜는 바른 선정에서 생긴다.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항심(恒心)의 유무에 달려 있다고 한다. 생각 생각 끊이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삼독심(三毒心)을 여의면 지혜의 등불이 켜져 깨달음을 얻고 저 열반의 언덕에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배광식/ 1949년 서울생. 서울대 대학원 졸업 박사학위.
83~86년 원광대 치대강사. 현 배광식치과 원장
서울치대 외래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