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경가며 대주사 담무참(曇無讖)스님

중국불교의 異僧②

2007-10-11     관리자


<1>양주의 불교문화
중국 감숙성 (甘肅省) 무위현성(武威懸成)에는 유명한 동종이 있다. 이 종은 높이 2.4m 구경 1.45m인데 그 문양이 너무나 화려하다. 첫째 층에는 화관을 쓴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손에는 과일을 담은 쟁반을 들었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는 모양이다. 그 위 둘째 층에는 비천과는 대조적으로 세 사람의 천왕이 용맹한 형상을 하고 갑옷을 입고 손에는 무기를 잡고서 야차 위에 서 있다. 이유명한 무위의 동종은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그보다 일찍이 전량왕(前涼王)인 장천석(長天錫,363~76재위)이 만들었다고도 전해온다. 이 땅을 5호16국의 호족들이 정복자로서 군림하고 있을 대 무위 땅은 양주(凉州)라고 하여 전략상 요지였다. 이 동종은 실은 대운사(大雲寺)종이다. 일찍기 홍장사(弘藏寺)였는데 뒤에 천사암(天賜庵)이라 개명되고 당나라 때에 대운사가 되었다. 대운사는 1927년에 지진으로 파괴되고 지금은 종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무위현성 서북쪽 2킬로에는 동진(東晋)시대에 지은 해장사(海藏寺)가 있다. 이 해장사 둘레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버들과 솔이 우거져 커다란 풍경지구를 이루고 있다. 옛날 양주 땅은 커다란 불교도시였다.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423~ 452재위)가 439년 양주를 점령하였을 때 양주 성내에는 인구 20여 만,창고에는 무수진보가 쌓여 있었다. 그는 양주를 점령하고서 주민 3만 여가를 평성(平成)으로 옮기고 재보와 불교문화도 옮기어 그 결과 운강(雲岡)석굴을 만들었던 것이다. 양주는 동서 교통의 요지이므로 많은 서역승들이 이곳을 지나 장안(長安)으로 갔다. 담마밀다(356~442)가 그랬고 구마라습이 그랬다. 이 땅에서 활약한 신승의 한사람이 담무참(曇無讖)이다.

<2>귀신을 부리다
위서(魏書) 권99에는 담무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빈의 사문인 담무참이 선선(鄯善)에 들어 와서 말하기를⌜나는 귀신을 잘 부리고 병을 고치며 아들을 얻게 한다.⌟했다. 몽손(蒙遜)이 그를 총애하여 성인이라고 불렀다. 몽손의 여식, 자부들이 모두 그의 설법을 들었다.⌟담무참은 선선국에 왔다. 담무참이 이 나라에 오기 10년 전에는 법현(法顯)이 찾아왔다. 법현의 불국기(佛國記)에 의하면, 선선국왕은 불법을 믿고 승이 4천여 인이나 있었으며, 승들은 천축의 경을 읽고 천축어를 배우며, 그 가르침은 소승불교였다. 대승불교가 성한 구자국(?玆國)에서 온 담무참은 선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욱이 담무참은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을 모시고 선선국에 온 것이다. 위서(緯書)에 의하면⌜담무참은 스스로 자기는 귀신을 부리고 병을 고치며 부인에게 많은 아기를 낳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담무참이 귀신을 부린 것은 사실 인 듯, 고승전에 보이는 그의 전기에도 쓰여 있다. 그가 양주에 갔을 때 북양왕인 몽손에게⌜귀신이 성 안에 들어왔다. 반드시 재난이 일 것이다.⌟말했는데, 몽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담무참은 몽손 앞에서 귀신을 부리는 기술을 보였다. 놀랜 왕은 곧 성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주도록 부탁했다. 담무참은 신주를 외우기를 3일 만에 귀신들은 모두 쫓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국경에서 수백의 귀신무리가 도주하는 것을 본 것이다. 처음에 정선국에 있다가 양주로 왔다. 양주에서도 아기 낳는 기술을 부인에게 가르쳤다. 어떤 기술을 가르쳤는지는 모르나 양주에 부녀들이 무리를 이루어 그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고승전에는 그와 같은 말은 없다. 담무참은 부인들을 지도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유랑의 길
고승전에는 담무참을 평가하기를 ⌜박통다식(博通多識)하기는 라습(羅什)과 같고, 비밀주의 신기로운 영험은 불도징(佛圖澄)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는 구마라습과 불도징의 두 사람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라습과 같이 어학에 능통하고 박학다식하고, 불도징처럼 신통력을 나타냈었다. 담무참은 10세 때 벌서 두각을 나타내어 경을 하루에 1만여언(言)을 외우고, 논쟁하면 지는 일이 없었다. 대승 교학에 통달한 백두(白頭)선사에게 열반경을 받아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향했다. 20세 때에는 대・소승경전 200여 만 언(言)을 외웠다고 하니 참으로 초인적인 박학다식이다. 그는 불도징처럼 주술에도 뛰어나 대주사(大呪師)라고 불리었다. 계빈(罽殯)국왕이 산에 갔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을 때, 담무참은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을 내어 왕의 신뢰를 받았다. 그후 왕의 신뢰가 박해지자 그는 대반열반경과 보살계본을 가지고 구자국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구자국 사람들은 소승불교를 믿고 있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담무참은 다시 선선국으로 간 것은 앞서 말한 바이다. 선선국을 떠나 담무참은 다시 돈황(敦煌)으로 갔다. 돈황은 이미 막고굴(莫高窟)법당이 개착되어 서역제일의 불교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거기서 보살계본 1권을 번역했다. 그는 돈황 체재 중에 중국어를 배웠다.

<4>하서왕과 담무참
몽손이 양주를 점령하고 하서왕(河西王)이라 한 것은 412년이고 다시 서량을 점령하여 하서회량을 완전 제압한 것은 420년~422년 사이다. 하서왕이 담무참을 청하여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는 기사도 있으나 신용할 수 없다. 담무참은 수년간 돈황에 있다가 혼자서 양주에 갔다. 궁중에 있었던 격이 아니라 유람하는 나그네였다. 그러나 열반경 등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만은 절대로 버림이 없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담무참이 양주에 도착하자 어느 역사에 머물었다. 경본을 도둑맞을까 두려워하여 경본을 목침 삼아 잤다. 3일째 되는 날밤 몽중에⌜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적은 것인데 어째서 그것을 목침으로 하느냐.⌟소리가 들러왔다. 놀라서 참회한 담무참은 경본을 높은 곳에 옮겼다. 그 날 밤 경전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으나 너무 무거워 그것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신통력을 가진 담무참의 명성은 곧 하서왕 몽손에 알려졌다. 그의 명성을 들은 왕은 그를 불러 만나 보고 크게 대우했다. 430년 서진(西秦)이 멸망했다. 이말을 들은 몽손은 불교에 대한 신뢰심이 없어졌는데, 그때에 몽손이 어머니를 위하여 모셨던 대불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담무참은 몽손을 간하였고 왕도 개심하여 회개했다. 몽손은 원래 성질이 잔인했고 예절을 몰랐다. 이런 무도한 호족의 천자가 담무참을 중용한 것은 그를 불교자로서 존경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담무참의 신통력을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5>괴승의죽음
담무참의 뛰어난 주술을 전해들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양주에 사신을 보내어 담무참을 맞아오게 하였다. 태무제는 몽손에게 만약 담무참을 보내주지 않으면 출병한다고 위협했다. 국력이 약한 하서왕은 곤란에 빠졌다. 담무참을 북위로 보낸다는 것은 불안해 했다. 태무제가 담무참의 주술력을 이용하여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그러나 태무제는 강경했다. 사자 이순(李順)을 양주에 보내어 담무참을 보내라고 독촉했다. 몽손은 이순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말했다.⌜나는 북위에 반역할 뜻이 털끝만큼도 없다. 그런데 태무제는 담무참을 보내라 한다. 담무참은 우리의 문사(門師)이므로 보낼 수 없다. 나는 그와 더불어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                                                                                                                                              몽손은 담무참을 북위에 보내지 않았다. 몽손은 담무참의 주술이 북위에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여 그를 죽일 결심을 했다 .433년 3월 마침 담무참이 서역에 가서 열반경의 후분(後分)을 구해오겠다고 말했다. 몽손은 담무참이 북위로 도망치는가 의심했다. 노발대발한 몽손은 담무참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를 안심시키고자 여행에 필요한 물자, 식량, 보화 등을 그에게 보냈다. 담무참은 암살당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경을 구하러 떠나는 것을 호의로 원조해 주는 것으로 알았다. 담무참이 출발하던 날, 열반경 후분을 구하기 위하여 떠나지 않을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대중과 작별했다. 양주를 떠나 4십리 밖에 이르러 몽손은 자객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그는 49세였다. 대중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역경자로서의 어학력과 뛰어난 주술을 아까워 했다. 그가 죽던 날 대낮인데도 몽손의 주위에는 칼을 든 귀신이 둘러서 몽손을 치려고 했다. 얼마안가 몽손은 병으로 죽었다. 담무참은 귀신을 보내어 그를 죽인 것이다. 담무참에게는 2가지 성격이 동거하고 있다. 일면에는 주술을 부리고 또 다른 일면에는 계율을 주는데 매우 엄격했다. 장액(張液)의 사문인 도진(道進)이 담무참에게 보살계를 받고 싶다고 했다. 담무참은 죄과를 참회하고 오라고 했다. 8일8야 동안 참회를 한 도진이 담무참에게 가니 그 정도 참회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도진은 좌선과 참회생활에 들어가 마침내 3년만에 선정 중 부처님에게 계법을 받았다. 이 사실을 담무참에게 전했더니 자기가 그대를 위하여 계 받은 증명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보살계본을 번역한 담무참은 주슬을 사용하여 귀신을 부렸다. 또한 왕성한 그의 생명력과 두뇌는 어학력을 구상하여 대반열반경 36권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열반경의 불성설(佛性設)은, 그때까지 공사상만 소개수용된 당시의 온 불교학계에 큰 충격을 주어 중국불교에 불성의 사상이 도입되어서 여러 학설을 낳게되고 남북조시대에 학파 불교를 낳은 것이다.

<이글은 일본 大法論 제 54권 제 2호의 초역이다. 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