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구 모스코바를 가다(4)

전법기행

2007-10-11     관리자


이글은 숭산(행원)스님의 폴랜드와 모스코바 포교기행문이다.

<18>모스코바의 인상
그런데 역시 길은 있었다. 어떤 부인이 다가오면서 선사님 ! 하고 부르는 것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알만했다. 80년도에 내가 폴랜드에 갔을 때 나에게서 5계 를 받은 불자다. 대학교수 부인인데 이름을⌜마이코로기⌟라 했다. 얼마나 반 가운지 아마도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심정을 알만했다. 그 부인 뒤에 두 청 년이 따라 나서며 인사를 한다. 이 남녀는 티벹 불교신도인데 이 교수 부인으 •崇山行願 로부터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한 송이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영산회상의 부처님에 꽃과 다를 것이 없다. 감사하다.⌟라고 답례를 했다. 어느 호텔이냐 하기에 종이를 보이니 전화를 걸어 알아보고 택시를 탔다. 벨그라드 호텔인데 공항에서 30분 거리쯤 되는 모스코바의 중심가에 있었다. 거리도 번화하고 높은 빌딩이 많이 보인다.
오는 도중 크레믈린궁전 앞을 지나면서 높은 집 꼭대기에 큰 별모양을 한 붉은 네온이 일곱군데나 있는 것을 보았다. 밤하늘에 붉은 별의 네온이 사뭇 인상적이다. ⌜저 곳에서 소련의 흥망성쇠와 역사가 이루어지는구나. 그리고 오늘날 세계 공산국을 호령하는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방에 들어가니 고급호텔이라는 것이 뉴욕이나 서울의 2류호텔보다도 못하다. 베드, T.V, 목욕탕 등이 그렇고 방도 크지 않다. 이 정도가 소련의 경제수준인가. 짐작할 만했다. 투루이라는 청년이 벌써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 세 사람이 23층 18호 내 방을 찾아왔다. 반가히 인사를 하고 요가를 배우며 선에 대한 책을 읽었노라고 말한다. 함께 커피숍에 가서 간단히 식사를 하면서 선과 요가와의 차이, 티벹불교와 선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여 주었다. 저들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져 나는 방으로 돌아와 모스코바의 첫밤을 지냈다. 아침 3시에 일어나 일상 하는대로 500배 하고 잠시 참선을 했다. 그림엽서를 쓰고 기행문을 정리하니 8시다. 조반은 식장에서 그냥 주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가니 호텔식당 관리인이 카드를 보자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몽고에서 왔느냐고 붇는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내가 몽고인으로 비친 모양이다. ⌜아니요, 코리아요⌟ 라고 하였더니 오호-하며 진기하게 생각되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안내한다. 식당에서 먼저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무표정이다. 식당에 온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이나 모두 무표정하고 미소가 없다. 인정이나 정서를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얼음판이나 냉장고 속과 같은 느낌이다. 폴랜드나 중공과는 판이하다. 더구나 서로 말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다. 소련 사람들은 대개 얼굴이 넓고 코가 크고 얼굴이 붉다. 모두가 미남자며 미녀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돌장승처럼 무표정하다. 그 사회, 그 사상, 그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같은 공산국이라도 중공이나 폴랜드는 그렇지 않다. 조반을 먹고 거리로 나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았다. 출근 시간이다. 소련 사람의 무표정을 호텔안만 그런것이 아니라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다. 웃음이 없는 나라, 말 못하는 나라, 인정이 없는 나라라고 비쳤다면 나의 편견일까. 희망도 욕망도 자유도 없는 쓸쓸하고,차디찬 표정들이다.

<19> 소련사회 소련사람
오전 10시 우리 불자들이 내 방을 찾아왔다. 문에서 소련 사람들은 마음대로 들어올 수가 없다. 미리 외곡의 손님이 문지기한테 일러놓아야 들어올 수 있다. 문지기는 누가 누구를 찾아 왔는가를 하나하나 기록한다. 이런 불편한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오늘 계획을 세웠다. 시내관광버스가 있다기에 그 편으로 시내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여름철에는 각 호텔에서 버스가 떠난다는데 내가 간 것은 겨울철이라 크레믈린 궁전앞 광장까지 찾아가서 오후1시부터 4시까지 관광하기로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만 가고 내국인들은 못간다고 한다. 이유는 외국인은 외화로써 표를 사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소련사람은 안된다는 것이다. 차내 안내는 영어로 하기 때문에 불편이 없다고 한다. 다함께 점심을 먹으로 식당에 갔다. 고급식당이다. 그러나 친절이나 봉사하는 자세는 조금도 볼 수 없다. 다만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움직인다. 온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이나 평등하다는 것이겠지. 먹기 싫으면 그만 두고, 손님에게 잘 하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손님들도 친절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구조가 그러니 그곳 사람들은 그것이 정상이지만 우리 눈에는 그것이 보통으로 비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이 기계적이요 냉정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불자들 눈으로 볼 때 그곳 사람들의 왕래는 인간이 왕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기계 로봇이 오고가고 갖다 주고 치우고 하는 듯하다. 자비로운 말, 따듯한 인정, 만남의 반가움, 이런 것들은 전혀 버려진 사회인 듯 하다. 평등도 좋지만 자비를 수반하는 평등이어야 하고 인정이 통하는 평등이어야 동체자비(同体慈悲)의 진평등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든다. 우리 불자들 4사람이 같이 점심을 먹었다 .불심으로 모인 우리 불자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았다. 너무도 인정이 많고 뜨거움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것이 소련 사람의 본 성품일 것이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동체(同体)가 되어버리는 듯하다. 불평이 없고 이유가 없다. 좋다면 할 뿐인 것이다. 얼마나 단순하고 분명한가. 자유가 있고 가진 것이 많으면 이유가 많고 불평이 많고 해태심이 많다. 그런 속에서 더욱 정진하고, 좋은 환경의 울타리를 끊고 바른 정진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생각해 볼 일이다. 오후 1시가 되었다. 관광버스에 탔다. 버스 안에는 독일인이 4~5명, 영국인이 2명, 그 외 3~ 4명해서 모두 10명 정도다. 안내양의 영어는 유창했다. 안내양은 모스코바의 역사를 요령 있게 설명했다. 12세기초 이곳 영주가 목조건물의 도시를 지어 모스코바의 터를 잡은 이야기로부터 13세기에서 15세기 반까지 이르는 몽고군의 점령시대, 그리고 모스코바 대공국 건설시대를 설명했다. 그리고 동은 캄차카서는 프로이센, 북은 북극, 남은 터키어까지 확대된 로서아 대제국의 형성도 설명했다. 그리고 1917년의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에 성립도 설명했다. 헉명 후 벌써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소련은 공산국의 왕좌로써 군림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탄 관광버스는 넓은 모스코바 중심가 도로를 지나 크레믈린 궁전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모스코바 강변에 이르러 멈췄다. 여기서 우리는 각기 사진을 찍었다.

<20>크레믈린 궁전을 가다
크레물린은 삼각형으로 성벽이 쌓아 올려 있었다.넓이는 약28만 평방미터가 된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을 한 바퀴 돌고 크레믈린안으로 들어갔다. 크레믈린 궁전은 14세기 후반의 목조 건물에서 모두 석조 건물로 바뀌었다. 당시의 제왕이 이태리로부터 르네상스 문화를 개척한 고명한 건축가들을 초정하여 건축하였고 높은 보수를 아끼지 않고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라며, 제2의 로마를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웅장한 사원들의 지붕은 양파같은 지붕이 대여섯개씩 되었으며 금은색으로 빛이났다. 지금의 붉은광장은 그때에는 상업 광장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붉은광장을 중심으로 남쪽에 대회궁전이 있어 공산당대회, 오페라, 발레 등을 하고 있는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 있다. 그 옆으로 무기고와 박물관이 있으며 그 맞은 편에는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아름다움과 건축양식은 세계적인 것이다. 가히 그때의 로서아 제국 사람들의 강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또 종교심도 두터움을 알 수 있다. 브라주에는 이 사원의 아름다운 색체와 건축미는 가히 세계적 보물이라 할만하다. 크레믈린 궁안에 소련 정부와 12사도 사원과 대포왕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대포가 있으며 종의 왕도 있다. 종의 구경이 6.6미터이니, 이 얼마나 큰 것인가. 또한 종루(鐘樓)가 82미터나 되는 것이 있고 그 속에 21개의 종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어 그것 또한 유명하다.
붉은 광장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넓이는 7만 3천 평방미터라 한다. 거기서 서쪽 성벽에 레닌묘가 있으며, 북쪽에는 혁명광장이 있고 국립 역사박물관이 있다. 남쪽에 브라주에는 이사원이 있으며 동쪽에 국영백화점이 있었다. 여기에는 외국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모두 어마어마하게 크고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그러나 오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외국인만이 아니었다. 소련인도 수만명에 오고 간다. 그러나 저들은 말이 없다. 대열을 지어 구령에 맞추어 단체로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숨이 꽉꽉 막힐 것 같았다.

<21>모스코바 지하철
우리일행은 그곳을 나와 레닌 도서관을 보았다. 장서가 2천 5백만권이 된다 하니 놀랍다. 열람실이 20개가 되었다. 그리고 중앙 전시장과 갈인인가를 지나 각국 대사관촌을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많은 박물관과 문화회관도 있었다. 특히 수도인은 보이지 아니하고 박물관이나 도서관이나 문화관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다음 레닌광장은 10만3천명을 수용하는 광장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수영장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 시설이 있다. 그리고 모스코바 대학인데 레닌언덕이라고 하는 나지막한 언덕에 선 웅장한 건물이 이 대학이다. 3만 5천명의 학생에 구내 연구실이 102개, 실험실이 1천개, 강당이 148개 있다고 한다. 모스코바 지하철이 유명하다 하기에 한 번 타보았다. 모두 화강석으로 기둥이고 마루고 천장까지 되어 있었으며, 천장이 높아 상쾌하고 깨끗하다. 벽에는 2차 대전 때 영웅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역시 모스코바 지하철은 훌륭했다. 불란서 파리 지하철도 잘되어 있으나 아름답기만 하고 웅장하지 못하며 깨끗하지 못하다. 관광하며 사진을 못 찍었다. 그것은 폴랜드 마르크법사가 준비해 가지고 오기로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아 소련제 카메라를 55불 주고 샀으나 카메라도 필림도 모두 시원치 않다. 상점 아가씨들도 무표정하며 사무적이다. 좀더 친절하고 봉사적이었으면 좋겠는데 사회구조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 기계화는 이런 상점에서도 볼 수 있었다.

숭산스님  •1927년 평양출생 •동국대 졸 •조계종 교무부장 •조계종 재일 홍법원장 •현 조계종 재미 홍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