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成道)-

교학강좌(I)/영원하신 부처님(5)

2007-10-11     관리자


이 글은 불광 바라밀 교학강좌에서 행한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文責記者-

무명의 밑뿌리를 제거하다
보리수 그늘 밑에서 연정초를 깔고 앉은 수행자 고타마는 맹세를 했습니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를 일어나지 않겠다. 즉 출가의 목적이 이 자리에서 달성되지 않으면 죽어도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뒷날 「금강보좌」라고 불렀습니다.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물체 중에서 제일 굳셉니다. 어떤 물체가 거기에 부딪혀도 부딪치는 물체가 깨어집니다. 그것처럼 부처님의 결심은 모든 번뇌, 모든 무명, 모든 장애의 마물들이 부처님의 결심을 방해하기 위해서 부딪힌다면 그 마물들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앉으신 그 자리를 금강보좌다, 보배자리다. 금강석의 보배자리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오랫동안 길을 헤맸던 당신의 잘못된 길을 결산하고 바른 길을 이제 찾는 그런 일이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그분이 찾고자 했던 길이 무엇입니까? 출가의 동기를 이루는 겁니다. 출가의 동기라 하는 것은 생․ 로 ․병 ․사의 괴로움과 우(憂) ․비(悲)․고(苦)․ 뇌(惱)가 엉켜있는 인생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여기에 속박된 나를 벗어나 대자유인,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길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천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길도 아니고 천신을 믿음으로써 해결되는 길도 아니고 또 자기 몸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심한 그런 고통을 가해서 해탈을 얻는 것도 아니고 또 선정, 즉 요가 ․수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정신이 통일된 상태<열락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도 아닌 완전한 자유의 세계, 그래서 괴로움이 없는 안온한 최상의 행복세계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우유죽을 마시고 힘을 얻은 젊은 수도자 고타마가 보리수 아래 시원한 곳에서 결가부좌하고 편안한 자세로 대자유인의 세계를 더듬어 나갔던 겁니다. 인도에서는 생각을 한다든지 수행을 한다든지 종교를 한다든지 하는 분들이 앉는 자세를 결가부좌라 합니다. 부처님의 앉은 자세는 부처님께서 처음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인도의 종교인들이 행하던 앉음 자세인 겁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눕는 것보다도 앉아서 정신통일을 했던 겁니다. 우리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상당히 힘든 것 같지만 종교인들에게는 제일 편한 자세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똑같은 자세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자기 세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적, 열반을 얻게 됩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세계를 말합니다.「현실적인 부자유와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괴로움이 무명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무명을 제거함으로써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늙고 병들고 죽고 또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번뇌의 모든 괴로움은 목숨을 받고 태어났다는 생이 있기 때문에 결과된 것이고, 우리가 태어났다고 하는 삶은 또한 그것을 가능케 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인데, 그 최초의 원인이 무명이라면 그것을 밑뿌리부터 제거할 때 그것에 의하여 일어난 모든 결과인 현실의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수행자 고타마는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명의 밑뿌리를 뽑아버리면 그것이 곧 무고안온,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자 고타마는 자신의 깊은 내심의 세계를 성찰하게 되었고 그래서 연기의 도리를 발견하고 깨쳤습니다.

연기의 법칙을 증득하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그것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 즉 그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 세상의 현상은 하나도 예외가 없이 인연에 의해서 결과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남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에 남자든 여자든 우리 부모님이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불구자가 아니라면 자식을 낳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냐, 딸이냐 하는 게 마음대로 안됩니다. 전부다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붉으냐, 푸르냐, 향기가 좋으냐, 향기가 나쁘냐 또는 열매가 실하냐, 열매 맺지 못하고 시들어지느냐 하는 것은 전부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현상은 다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해서 연기의 법칙이라고 그럽니다. 연기라 하는 것은 연(緣)은 조건이고 기(起)는 일어난다, 결과된다. 이런 얘깁니다.
연기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연기의 법칙을 어긴 게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표현하기는 쉽지만, 그 연기의 법칙을 우리가 그냥 연기의 법칙이라고 인식하는 것 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그래서 증득(證得)이라고 합니다. 자기화해야 합니다. 자기를 인격화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써 연기의 법칙을 깨달았다 하는 간단한 그런 표현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세계 속에 스스로 들지 않고는 그런 설명 못합니다. 그래서 깨달으신 부처님도 아무에게도 옮겨서 일깨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주일동안을 가만히 깨달은 열락의 세계에서 잠겨있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소식입니다.
그런데 연기의 법칙을 발견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완전히 모든 현상의 모순 그리고 원리를 다 체득해야 비로소 그런 경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과 그리고 노력, 마음의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이 모순스러운 우리의 여러 현상의 업이라든지, 다른 여러 조건에 의해서 스스로 장애가 되고 또 스스로 장애를 일으킵니다. 그런 것을 드라마처럼 엮은 것이 부처님의 팔상록에 나오는 「수하항마상」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부처님의 경전에는 고타마의 이러한 미증유의, 아직 아무도 경험 못한 진리세계의 증득을 수하항마라는 설화를 통해서 드라마화 하고 있습니다. 그 항마상에는 파순이가 여러 가지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실로 마왕 파순이는 망해하는 존재지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을 시험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한 마왕 파순이 입장에서는 망해하는데 모든 것을 동원한다고 그럽니다. 마군들을 수천 명, 수만 명 동원해서 활도 쏘고 창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흔들림없이 견뎠고 나중에는 오만 요술과 조화를 다 부려도 부처님의 정각의 길을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 앉으신 그 자리를 금강보좌라고 표현한 그대로입니다. 그 결심 그 진리를 발겨나려는 그 눈매를 스스로의 모순과 무명의 껍질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안개구름을 헤치고 태양이 아주 밝은, 열기있는 빛이 내쏘듯이 부처님의 세계는 결국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마왕 파순이가 자기딸 셋을 보내서 유혹합니다. 수도하는 사람들이 제일 수도하다가 중간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선정적인 여자의 몸매를 보고 실패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예를 부처님의 수도에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는 부처님의 금강처럼 굳은 마음에는 조금도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깨달음의 길에 더 자신감 넘치게 도와준 결과 밖에는 안되었습니다. 슬기로운 이에게는 방해가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겁니다. 우리 불법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일체의 최승자가 되다
실제에 있어서, 우리 부처님의 세계에서는 부처님을 외쳐가지고서는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외치면 응답이 나옵니다. 그 하느님은 바로 유태인들의 민족신인 여호와가 아닙니다. 정법과 그리고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바로 제석천입니다. 제석천을 우리 조상은 대대로 하느님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석천 하느님은 부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부처님의 호위병입니다. 졸병, 부처님의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신 부처님, 법신불이 무슨 응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몽매한 중생들은 제석천을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 하느님은 부처님의 자비심에 힘입어 도와주기 위해서 응답을 하는 겁니다. 결코 그 하느님은 헤브라이족의 씨족신인 여호와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자비의 힘은 관세음보살의 형체를 가지고도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의 형체를 나타내던, 하느님의 형체를 나타내든 똑같은 자비의, 부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영험없고 하느님이 영험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손오공이 제 아무리 하늘 끝까지 날고 뛰어봐야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 맴돌더라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산중에 불교가 쫓겨 있었던 조선시대 진묵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그 힘든 산길을 보리쌀 1되박을 이고 아주 힘겹게 오셔서는 그 스님앞에 보리쌀을 내려놓고 「스님, 큰일났습니다. 우리 손자 아무개가 지금 머리가 아파서 뒹구는데 이것 큰일났습니다. 불공 좀 올려 주십시오.」그래서 진묵 스님이 「보리쌀을 잘 씻어서 깨끗하게 했으면 밥지을 필요없이 법당에 얹어 놓으시오. 그리고 절 세 번하고 신중단에 올려놓고 그냥 가시오. 내가 불공 잘 모실테니까.」
「제 눈으로 봐야지요.」「안보셔도 됩니다. 내려가면 애가 웃을거요. 벙글벙글 웃으면서 반가와서 치마에 매달릴거요.」그래서 그 할머니는 거짓말 안하시는 스님이시니까 「스님만 믿습니다.」그래서 그 할머니는 거짓말 안하시는 스님이시니까 「스님만 믿습니다.」하고 손자가 걱정이 되어 뛰어내려 갑니다. 그동안에 진묵스님은 보리쌀이 놓여 있는 신중단에 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나 없으면, 맨손으로라도 그 신중들을 가운데서부터 뱅뱅 돌아가면서 알밤을 줍니다. 탁탁 칩니다. 정법을 잘 수호한다면, 정법을 받드는 신도의 손주 아무개를 왜 아프게 했냐 그 말입니다. 기합을 주는 겁니다. 불법은 그런 겁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할머니 보살님이 집에 가서 보니까 진짜 스님 말씀대로 손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놀다가 「할머니 어디갔다 오세요.」하고 치마에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든지 산신님이든지 모두 다 정법을 수호하는 호위병들이고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졸개, 보디가드인 것입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장애를 물리치고 나니까 그 많은 천신 또는 귀신들이 부처님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를 하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인도의 다른 종교와 불교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출현 이전에는 사람이 신의 노예, 하느님의 노예, 귀신의 종이 되어서 벌벌 떨었는데 부처님의 세계가 열리고부터는 신이, 착하고 어진 사람을 도와주는 종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신이 목적을 달성하셔서 외친 소리가 「나는 일체의 승자이며 모든 것에서 가장 이긴 자다.」이 말입니다.
「일체의 지자이다. 가장 지혜로운 자」「모든 법에,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다.」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 번뇌망상, 생로병사, 고에 허덕이는 노예로서의 모든 것입니다.가래(아주 자기만 알고 남을 모르는 치사스러운 욕심을 말하는 것임)가가 다하여 해탈했다. 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큰 자유의 삶을 얻었으므로 모든 중생 중에서 최승자이며, 가장 이긴 자이며,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체득하여 완전히 깨쳐 알아서 자주적인 대각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로병사의 괴로운 소용돌이를 벗어나서 무고안온의, 괴로움 없고 편안함만 있는 열반을 증득한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라는 것은 보편 타당한 우주, 인생의 참된 진리를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종교마다 자기 종교의 교리를 진리라고 말합니다. 자기 종교의 절대자를 영광스럽게 하고 숭상하는 것 외에는 진리가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그 종교의 목적에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절 안하는 게 진리가 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초상을 치르고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위패를 모시며 나중에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자손의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진리에 부합된다고 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나 혹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 그 진리는 절대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보편타당한 것도 못됩니다.
보편타당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굴러도 진리고 물구나무서도 진리는 진리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진리, 보편타당한 진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또한 보편타당성을 지닌 진리는 참된 진리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보편타당하지 못한 진리는 , 자기의 것이 되어버리면 남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 종교가 주장하는 왜곡된, 편협된 진리의 주장은 다른 종교에서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편타당한 진리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하면 남의 것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자기화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기화는 또한 완전한 남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화는 진리 체득의 실천적 체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삼독 신의 노예가 아닌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도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격을 완성한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불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