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건강 교실

2007-10-08     관리자

적과의 동침’은 줄리아 로버츠라는 미모의 여배우가 주연한 영화의 제목(원제: Sleeping with the enemy)으로 1991년도에 처음 상영되었다. 이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인 로라(줄리아 로버츠)는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 남자 마틴(패트릭 버긴)과 결혼하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는 편집증적인 사람으로 심한 결벽증과 의처증으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폭행까지 일삼는다. 아내는 사망을 위장하고 도망가지만 남편은 끝내 아내를 찾아내게 되는데 결국 아내는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이게 된다.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로 일상생활에서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이 말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적이지만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잠정적으로 함께 협조하는 관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평소에 많이 사용되는 ‘적과의 동침’의 뜻과는 다르다. 후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윈-윈(win-win)을 위해, 상생(相生)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이지만, 전자는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해가 되는 제로섬(zero-sum)의 관계인 것이다.

윈-윈을 위한 적과의 동침
따라서 서로의 윈-윈, 즉 상생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적과의 동침’보다 기존에 있던 사자성어(四字成語)인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요즘 사람들에게 더 큰 감각적 호소력을 갖기 때문인지 일상생활, 특히 대중매체에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세계역사를 보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적의 적은 친구’라는 도식대로 눈앞의 적에 대적하기 위해 어제의 적이었고 또 미래에도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인 또 다른 적과 ‘동침’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지금의 국내 및 국제 정세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합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최근에는 독일에서 서로 이념이 다른 중도 우파의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과 중도 좌파의 사민당이 대연정을 통해 기독민주당 당수 메르켈을 독일 첫 여성총리로 만들었다.
이러한 ‘적과의 동침’은 최근에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 간의 관계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최근의 대표적인 예만 보더라도,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가 지난 9월말에 오랜 경쟁 관계였던 팜과 제휴를 하더니 이달 10월 초에는 오랫동안 시장에서 천적이었던 리얼네트웍스(RealNetworks)와 손을 잡았다.
‘적과의 동침’은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축구대표팀을 맡은 아드보카트 감독은 대표팀에서 동일한 포지션의 선수들이 같은 방을 쓰도록 하는, 그야말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동침’하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대표팀에서 원톱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는 이동국과 안정환, 사이드 공격수 포지션을 놓고 맞붙는 최태욱과 이천수, 미드필더인 박지성과 송종국이 한방을 쓰게 한 것이다. 서로 경쟁의식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동일한 포지션이기 때문에 서로 공유할 만한 이야기도 많고 생산적인 조언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적과의 동침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살 수는 없다.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성격과 욕구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고, 같은 나라에 살고 있고, 같은 회사, 같은 부서,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 곳을 피해 다른 곳을 가더라도 또다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도 싫은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물과 같고 공기와 같지 않은 한 거슬리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우리는 ‘적과의 동침’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적과의 동침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몸이라는 배에 다양한 ‘적’들을 함께 태우고 동침시켜오고 있는 것이다. 내 경우에 ‘김정호’라는 배에 다양한 ‘적’들을 태우고 50여 년을 함께 부대끼며 살고 있다. 지금 내 안에는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나(성취)’도 있지만,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나(놀이)’도 있다. ‘나(성취)’의 입장에서는 ‘나(놀이)’는 성취를 방해하는 적이다. 반대로 ‘나(놀이)’의 입장에서는 놀이를 억압하는 ‘나(성취)’가 적이다. 내 속에는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는가! 젊은 여성들의 경우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나(먹기)’도 있고 날씬해지고 싶은 ‘나(외모)’도 있다. ‘나(외모)’가 볼 때 ‘나(먹기)’는 얼마나 원수 같겠는가. 또 ‘나(먹기)’가 볼 때 ‘나(외모)’는 얼마나 폭군처럼 보이겠는가.

조화로운 공존과 성장
적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 대해 적이다. 우리 적들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 우리는 ‘적과의 동침’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적과의 동침’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서로 ‘틀리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보고 서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조화의 길, 윈-윈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적들이 서로 공존하지 못한다면 그 적들이 타고 있는 배 자체가 침몰할 것이다.
‘나(성취)’가 일방적으로 다른 ‘나’들을 억압하고 제거하게 된다면 결국 견제 받지 못한 성취욕의 독주로 몸의 건강을 잃게 될 것이다. 40대, 최근에는 30대에서의 과로사는 바로 이런 ‘나(성취)’의 일방적 지배에 의한 파국적 결과이다. 또 ‘나(외모)’가 극단적으로 지배적으로 될 때 건강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거식증에 걸려 사망에 이르게 된다.
서로 다른 종교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상호존중과 윈-윈의 길을 모색하지 않고 제로섬의 길을 고집할 때, 인류사회 전체는 파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구에 사는 다양한 생명들과 함께 공존의 길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만 살려고 할 때 지구 생태계는 파괴되고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 역시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개인적으로 우리 내부의 다양한 욕구들은 오나라 사람이고 월나라 사람이며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서로 싸워 배를 깨뜨리거나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여 안전하게 배를 몰아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항해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건강하고 조화로운 공존과 성장을 위해 줄리아 로버츠의 ‘적과의 동침’, 즉 제로섬의 ‘적과의 동침’이 아니고 오월동주의 ‘적과의 동침’, 즉 윈-윈의 ‘적과의 동침’이 절실한 때이다.

김정호 님은 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한국건강심리학회 이사, 대한스트레스학회 부회장으로 「인지과학과 명상」, 「위빠사나 명상의 심리학적 고찰」, 「체계적 마음 챙김을 통한 스트레스 관리」 등의 논문과 『스트레스는 나의 스승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