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에 대한 소고(小考) (2)

사색의 숲

2007-10-07     관리자

지난 번에 나는 색이 어찌하여 우리 인식의 대상을 통틀어서 부르는 대명사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었다. 플로리다 주의 남단(南端) 키웨스트를 여행하던 때의 체험-날이 저물고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길과 자동차와 바다와 섬과 하늘과 땅이 모두 안개에 덮여 그들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잃어버리게 되자,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앞에 엄연히 존재하던 세계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그 이상한 체험을 통해, 나는 색깔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 인식한 것을 정확하게 판별하는 데 있어 첫 번째 필수조건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었다.
비슷한 경험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한번은 햇살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스며들지 않는 지하 수십 미터의 동굴 속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갑자기 눈앞이 온통 까맣게 되어서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조차 의심쩍었다. 재빨리 눈을 서너 번 껌벅거리고,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옆 사람이 손에 스치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내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색깔이 오직 암흑의 색깔이기 때문에 눈이 아예 쓸모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색깔의 중요성에 대해 속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왜 색즉시공 공즉시색인가
색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나마 정리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나는 반야심경을 마주 대하고 앉아 곰곰이 되짚어볼 기회가 생겼다. 그저 염불 소리로 흘려만 듣던 구절을 한 자 한 자 쓰며 뜻을 헤아려보려니까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渡一切苦厄)’ 첫 구절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짤막한 경 전체가 의문투성이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다 공하다 하여 어찌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건널 수 있는가.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 지녀왔던 삶의 목적, 의의, 가치 등에 대한 회의와 상실을 초래하며 그로 인해 더욱 심한 실망과 괴로움의 늪에 빠질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색이 어떻게 공이며 공이 어찌하여 색인가. 내가 속해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있는 사물을 분별하고 경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첫 번째 도구가 색깔이라면, 공은 모든 분별을 없애고 세상과 사물과 나를 모두 함께 끌어안는 최종의 경지일 터인데, 그 둘이 위와 아래, 혹은 전과 후의 관계라면 또 몰라도 어찌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하여 등식(等式)의 양편에 놓일 수 있는가.
여름 밤, 반딧불 꽁무니에서 한 순간 반짝 빛나는 불빛처럼, 공에 대한 감지(感知)가 순간 느껴질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공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득도를 목표로 출가한 스님들이 깊은 정진과 오랜 수행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이 불교의 핵심 사상을 빈들거리며 놀다가 가끔씩 머리를 긁적거리는 호기심과 관심으로 이해하려든다는 것이 욕심이며 어리석음임을 시인해야 했다. 그리하여 공은 저만치 비껴 놔두고 색에 대해서 조금 더 파고들어가 보기로 했다. 색이라면 그래도 어디 한 군데 손에 잡히는 데가 있을 듯해서였다.
색은 햇빛의 굴절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무색(無色)의 밝음으로만 우리 눈에 감지되는 햇빛은 파장이 다른 여러 가지 색깔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햇빛이 어떤 대상에 닿았을 때 어떤 파장의 빛이 반사되느냐에 따라 그 물체의 색깔은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설명은 알쏭달쏭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의문과 흡사하다. 반사되는 빛의 파장에 의해 색깔이 결정된다면 빛 속에 있는 여러 가지 파장을 다 제쳐버리고 오직 그 색깔의 파장만을 골라 반사시키는 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햇빛에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들어있어서 나뭇잎에 닿으면 초록색, 민들레꽃에 닿으면 노랑색, 포도에 닿으면 보라색 하는 식으로 햇빛이 닿는 대상에 따라 반사되는 파장을 미리 다 입력해 놓았던 것도 아닐 터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색깔도 달리 보인다 아무래도 물체의 색깔은 그 물체 자체에 이미 내존(內存)하여 있는 듯하다. 이 추론(推論)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초여름에 콩알만하게 열매를 맺은 토마토는 한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계속 속이 말갛게 드러나는 연두색으로 자라다가 어느 날 불그스레해지기 시작하여 며칠 후 탱탱한 주황색이 되고 다음다음날쯤에는 터질 듯이 농익은 주홍색이 된다. 토마토에 닿는 햇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토마토 속의 성분이 변화함에 따라 색깔이 변화한 것이다. 또, 시원하고 잘 익은 수박을 먹다가 연분홍 수박물이 흰 블라우스 가슴팍에 한 방울 똑 떨어져서 분홍색 얼룩을 남겼다면 그 얼룩의 색깔은 수박물에서 온 것이지 햇빛에서 온 것은 아니다.
물감은 또한 어떤가. 사람이 만들어낸 물감의 유일한 목적은 색깔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인데, 파장이 다른 햇빛의 반사가 색깔이라면, 물감이란 햇빛 중에서 한 가지 색의 파장만을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그것을 물감 입자로 고정시킨 것이어야 한다. 물감 공장에 가서 확인해야 되겠지만 내 상식으로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중에는 색맹(色盲)도 있다. 나와 같이 일하던 분 중에 색맹이 있었다. 겉으로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니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한 얘기 끝에 자기가 색맹이라고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운전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발로 페달을 누르고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면 차는 앞으로 나가는데 모두들 그렇게 운전하는 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무안해서 얼른, 아니 그게 아니고, 신호등 불빛을 구별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자기는 붉은색 색맹이기 때문에 파란불과 노란불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빨간불은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거무튀튀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투우사가 성난 황소 앞에서 흔드는 핏빛 선명한 색깔도 이 분 눈에는 거무튀튀하게 보이고, 겹겹으로 접힌 꽃잎 열고 눈부시게 아름답게 핀 빨간 장미도 이분 눈에는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눈 또한 눈으로 보는 대상의 빛깔을 정하는 데 일조(一助)하는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색깔도 달리 보이는 것이다.
단순한 것으로 알고 시작한 색에 대한 모색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색이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색에 대한 나의 이해가 극히 피상적이었다. 색은 어떤 파장의 빛이 반사하는 것만이 아니고 햇빛이 닿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사람의 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세 가지 요소와 그 요소들이 엮는 과정, 그것을 통틀어서 공(空)이라 본다면 일리(一理)가 있는 것일까.

윤시내 님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 경기여고와 미국 메릴란드 대학 철학과 졸업. 1972년 미국에 이주, 메릴란드 주 실버 스프링에 살고 있으며, 1972년 세계은행(World Bank)에 입사, 1998년 은퇴 후 주말 한글학교 한글교사, 매릴란드 주 정부 승인 법정 통역 활동을 하였으며, 월간 미주현대불교, 미주 중앙일보에 비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E-mail: seenaeyoon@m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