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와 ‘생명운동’의 만남, 친환경공양미운동

나눔의 길/농촌문제, 불교적 대안

2007-10-07     관리자

나의 삶 속에서 우리나라 농업·농촌의 의미

도시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농업·농촌의 일이 나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생각이 큰 장벽이다. 도시의 삶 속에서 먹을거리는 단지 돈을 주고 거래하면 그만인 ‘상품’이다. 그렇기에 그 ‘상품’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단지 그것을 안정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버는 행위에만 관심이 높다. 장벽이 이것 하나라면 그래도 괜찮다. 공산품 수출이 위협 받게 된다는 입장에 서게 되면 농업농촌은 그야말로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아닌 천덕꾸러기처럼느껴지는 것이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 우리 사회는 농업과 농촌에 기반한 사회였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식량공급처는 이 땅의 농촌이 아닌, 미국 및 캐나다, 호주 등 세계의 곡물수출국가들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5%를 밑돈다. 네 끼 중의 세 끼를 수입해야 생존이 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가 미래의 희망으로 여기는 반도체나 자동차, 컴퓨터를 능가하는 가치로 식량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크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가 농업·농촌을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것일까? 농업·농촌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대접이 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불교의 인과응보의 원리로 보면 답은 뻔하다. 그래서 농업·농촌의 문제를 더 이상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닌, 농민과 도시민 모두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때이다. 마치 물과 공기가 흔할 때 그것의 고마움을 모르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듯이 먹을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사회평등’과 ‘생태건강’이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사회

요즘 세간에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사회의 전 분야에서 부와 권력 그리고 각종의 이권에 관한 뚜렷한 쏠림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는 사회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너무 크게 사회가 울퉁불퉁해지면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고, 이는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다 더해서 지난 90년대 이후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평등성과 함께 ‘생태건강성’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매년 심해지는 공해와 물의 오염 그리고 먹을거리의 오염 등이 도를 넘어서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과 공기, 먹을거리의 오염으로 요즘 아이들은 아토피에 시달리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비쳐지는 자연재해나 이상기온이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현대문명과 관계가 깊다는 진단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또 다른 형태의 ‘생태건강성’의 문제는 에너지 위기로부터 비롯된다. 날로 높아가는 석유에너지 가격이 걱정이다. 현대사회는 석유에너지에 의해 ‘먹을거리’가 생산되는 구조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석유’를 많이 사용하여 공업생산물을 생산하고, 수출하여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구조이기에 더욱 걱정이 크다.
만일 고유가가 충격적으로 우리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나라가 능히 이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 ‘지구차원의 생태건강성’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될 수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변 현실은 더욱 엄중하다. 우리 사회가 ‘사회평등성’과 ‘생태건강성’을 유지하여 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가야 할 시기이다.
불자들은 근본에서 생각하도록 배워 왔다. 올바른 관점과 바른 문제의식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기본이다. 화려한 도시의 일상을 지탱하는 뿌리는 ‘식량과 에너지’이다. 농업을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우리 국토의 생태계 균형을 맞추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리고 고유가 시대를 넘어서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나아가 아토피로 아픈 세대인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내는 선택이다. 향후 고실업사회를 살아가야 할 세대에게 중요한 일자리를 만드는 선택이다. 이 일은 가장 크게는 지속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받고 있는 ‘산업도시문명’을 대체한 새로운 ‘생태문명’의 기초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불교전통’과 ‘생태생명운동의 가치’가 만나는 친환경공양미운동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뒷산에 있는 ‘미륵사’에 가시는 날이면 몸을 단정히 하셨다. 그리고 강원도에선 꽤 귀하던 쌀을 한 되 담아 길을 나섰다. 그 곁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가져간 쌀은 공양미로 부처님 전에 올려졌다. 쌀은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불자의 정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공양미 삼백 석’은 용왕을 감동시킬 수 있는 효녀 심청의 정성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아직도 실제 사찰의 공양미는 사찰의 스님과 신도 등 사부대중의 대중공양물로, 그리고 사찰과 유관한 여러 복지시설과 교육기관의 공양물로 쓰여지고 있다. 공양미의 전통은 개인의 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으며, 불교신앙문화로서도 대중공양의 징표로서의 기능을 가지며, 사회적으로도 복지를 통한 사회 회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복합의미를 가지는 불교전통은 충분히 이어갈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불교계는이러한 좋은 전통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현대적 재해석 작업을 잘 진행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의 미래, 나아가 지구 생태계의 보존이 ‘친환경농업’과 ‘친환경농산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사회적 토양이 친환경농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갖가지 문제로 괴롭다. 도시오염과 교통지옥 그리고 대규모의 실업사회, 낮아지는 경제성장률, 그리고 농촌문제로도 괴롭다. 외국의 통상압력에 의한 ‘쌀 수매제도 중단’, ‘농촌공동화’ 등으로 농촌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기 힘들다. 도시를 초고속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농촌을 희생한 대가이다. 도시와 농촌의 조화로운 공존을 생각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도시와 농촌을 도시는 도시로, 그리고 농촌은 농촌으로 보아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은 본래 한 뿌리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 문제고, 농촌은 사람이 너무 적어 문제다. 그러니 농촌으로 사람이 이동하면 문제가 풀려나갈 것이라고 본다. 이 흐름을 만뜰기 위해서는 농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불교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친환경공양미운동은 ‘오랜 불교문화’와 21세기의 생태생명운동의 ‘핵심가치’가 만나는 사안이다.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살 만한 농촌’을 위한 거대한 몸짓이다. 그리고 불교계는 이러한 원리를 이해할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과 불살생의 생활원리가 교육되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요사찰이 농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사찰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종단을 통해 도시사찰과 농촌사찰이 기초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친환경공양미운동의 대중화를 염원하며…

친환경공양미사업은 불교의 오랜 전통인 ‘쌀을 공양하는 문화’와 ‘친환경쌀’을 연계하여 여러 불자대중들에게 제안하고 있는 사업이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우선 2005년 1월 17일에는 ‘봉은사’와 ‘친환경공양미 협약식’을 맺어 친환경쌀을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8월에는 부산의 홍법사와 협약식을 맺었다. 100가마의 친환경공양미는 약 6천 5백 평의 논을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양이며, 이는 농촌사찰을 중심으로 한 ‘친환경농업지구’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좋은 근간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불광사의 회주스님과 여러 스님들의 결심과 불광사 사부대중들의 관심으로, 지난 9월 11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불광사’간에 친환경공양미 협약식이 체결되었다. 불광사의 동참으로 횡성지역과 실상사 인근지역의 대중들과 전북 김제의 농부들이 지속적으로 친환경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토양이 그만큼 넓어지게 되었다. 기쁜 일이다.
절에서 신도들이 먹는 공양물을 친환경농산물로 전환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사회적 의미도 크다. 친환경공양미협약식은 농촌문제해결에 대한 불교계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이러한 운동이 주지스님을 중심으로 한 ‘협약식’에서 머물지 않고, 신도대중들이 직접 동참할 수 있는 준비를 꾸준히 해야 지속적인 대중운동으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정호 님은 고등학생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통해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선우도량’의 간사소임을 시작으로,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사무처장의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