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이 날아올 때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 이야기

2007-10-07     관리자

인생은 무수한 상황과 마주치면서 숱한 희비(喜悲)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무수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사람과 마주치는 상황이 절대적으로 문제이지요. 곧 사람과 마주치면서 숱한 희비를 경험하는 것이 삶입니다. 상대의 모습 여하에 걸려 생기는 희비, 상대가 나의 모습 여하에 걸려 반응해 옴으로써 생기는 희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때 희(喜)는 나의 행복이요, 비(悲)는 나의 불행입니다.
인생이 행복지향이라 볼 때 희(喜)가 많을수록 좋을지언정 비(悲)가 많다면 유감입니다. 대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마치 내 몸에 꽂히는 화살과 같습니다. 어떻게 비(悲)의 양과 정도를 줄이느냐 하는 것은 행복론을 말함에 있어서 중대 주제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비(悲: 불행)의 양과 정도를 줄이는 묘책을 이번 달의 명상 주제로 삼아봅니다.

불행을 줄이는 묘책
세상의 많은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많이 시달리면서도 시달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인생이라고 여겨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나머지 그 시달림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마음공부 부재 현상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어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면 즉각 발동되는 특공대를 마음의 한 모퉁이에 상설시켜 놓고, 관계에서 불편 정서가 일어났다 하면 즉각 특공대를 투입하여 불편 정서를 해결해버리는 것입니다. 도학적 인격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다양한 특공대를 시설해 놓고 마음의 평화관리를 민첩하게 해내고 있을 것입니다.
특공대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 하면 그 상황의 대응에 적절한 신념체계입니다. 간단한 촌철(寸鐵) 일반이 그것입니다. 좌우명일 수도 있고, 가훈일 수도 있고, 잠언(箴言)적인 속담일 수도 있고, 사자성어적인 교훈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중대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이지요.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자무적(仁者無敵), 우공이산(愚公移山), 지족구현(知足具現), 간이문(簡而文), 어느 구름에 비 내릴지 모른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화안애어(和顔愛語), 진공묘유(眞空妙有), 없어도 일곱 가지다, 수주지고(守柱之固), 자비무한(慈悲無限), 인욕무한(忍辱無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천재란 반복이 낳는다, 내 인생 복습만으로 충분하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지족제일부(知足第一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 저질러라, 제쳐라, 되는 것을 세어라, 윗물이 고와야 아랫물이 곱다, 하루에도 열 번 된다, 오늘 만난 선비 삼일 전 선비로 보지 말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실수하는 것이 사람이다, 행동은 일회적이요 인격은 다발이다, ‘나’ 하면 사라지고 ‘너’ 하면 빛난다, 일곱 번에 일흔 번을 용서하라,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청정(本來淸淨) 등등등. 가히 무수한 지혜바라밀이 있습니다.

마음 다스리는 강력 특공대
필자의 경우는 내관법(內觀法)과 외관법(外觀法)이라는 강력 특공대가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의 간단한 촌철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떤 모습이 안타깝다면(밉다면) ‘그의 역사적인 아픔[業: 업]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그의 그 모습은 그의 깊은 업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이 스스로도 쉽게 개선하지 못하는 고충어린 아픔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대중선방 생활을 주로 하던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공양(식사)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한 사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곁에 앉은 후배 스님이 식사를 할 때 콧바람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잦은 빈도로 그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귀에 거슬리는 정도였는데 급기야는 사람이 미워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모모 스님은 그 콧바람 소리를 안 낼 수 없어요?” 하고 다소 역정어린 목소리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스님 왈, “제가 그렇지요? 어렸을 때부터 그 버릇을 잡아주려고 부모님이 상당히 애썼는데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하시는 거예요. 나는 순간 ‘아하’ 하는 한 자각이 왔었지요.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식사 시간에 그 스님의 콧바람 소리는 여전했지만 내 마음은 평화로워졌습니다. 도리어 어떤 연민과 우호감까지 생기는 거예요.
그 단순한 콧소리 내는 버릇 하나에 그 사람의 고충어린 삶의 역사가 있었구나 하며 일파만파로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러할 게 아닌가 하는 이해체계가 내 의식공간에 확연한 지혜 하나로 시설되었습니다. 상대방 사람이 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어주면 좋을 일이지만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 안타까운(?) 모습이 나를 괴롭히는 화살이 되게까지 한다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입니다. 가히 무수한 경우에 ‘그의 아픔이지 않겠느냐!’ 하는 한 촌철이 사람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평화에 기여해왔던 것을 기억하면서 나누어봅니다.
상대방의 존재 모습이 나를 괴롭히는 화살이 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언행이 직접 나를 괴롭히는 경우야말로 제대로의 화살이지요. 쉽게 표현해서 공격을 받은 경우에 마음의 평화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경우는 경계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에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평화의 길임을 그런 경우에 처했을 때마다 번번이 느낍니다.
즉 ‘다 내 부덕의 소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덕이 넘치는 사람을 향해 공격하는 예는 드물지요. 덕불고(德不孤)입니다. 경계와 갈등상황에 대상을 탓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마는 그 마음이 이해는 되나, 아니다 하고 고개 저어집니다.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고인의 말씀이 중천금의 덕목임을 살아볼수록 절감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미워지려 하면 상대의 아픔의 역사를 떠올리고, 내가 미움을 받을 때는 나의 부덕(不德)을 돌아본다.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