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은 최상의 수행이며 공덕

특집/ 전법

2007-10-07     관리자

오늘의 사회는 그 속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도 함께 변하고 있다. 변화가 빠른 만큼 그 속에는 무수히 많은 문제점들과 고락이 함께 한다. 그런데 크고 작은 일상들을 부처님의 지혜로 잘 접목시켜 전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 불자들의 책무가 아닌가 한다.
어린아이에게는 30분 가량만 함께 있어도 포대화상보다 인기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학생들에게는 짧은 시간이나마 공을 차며 놀아주는 것도 최고의 친구가 될 것이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바라만 봐도 고민을 토해 낼 것이며, 군인들에게는 200원 남짓 하는 초코파이가 관세음보살님이 부어주는 감로수와도 같을 것이며, 어른들도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마음에서 시작된 역경이라고 확인시켜 줄 때 비로소 무거운 욕구의 짐들을 내려놓을 것이다.
병원의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는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될 때가 있다. 죄를 지은 이들도 있다. 경찰서 유치장이나 구치소, 교도소 같은 곳을 찾다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법을 펴는 본인 스스로를 반성하게 한다. 나의 게으름에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소년원에 들어오게 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다보면 일찍이 전법을 행하지 못한 스스로를 두고 죄책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수행의 궁극적 목적
요즘은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명상과 참선을 배우고자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한다. 그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말들이 필요하다.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다시 한글로 바꾼 것같이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도 현대의 전법방법일 것이다. 절을 찾는 관광객들도 더없는 전법대상이며, 누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법을 펴기 위해 대중 앞에 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려운 경전을 읽어가기가 힘들면 신나는 노랫가락을 부쳐 읽어갈 수도 있고 산속의 부처님 도량을 찾기가 힘들면 도심 한복판에 나와 도량석을 도는 것도 한 방편일 것이다. 신심을 일으키는 데는 틀이 없다. 대중 모두가 지혜를 찾아가는 데 그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
우리는 어려서부터 길가에 신호등을 보면, 파란불일 때 건너고 빨간 불일 때 멈추라고 배웠다. 하지만 고장난 신호등을 알면서도 마냥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보거나 법문을 듣고서 행해야 한다. 역대 조사 스님들도 자신들의 구도열 뒤에는 중생들을 생각하는 정진이 있었던 것이다. 근세에도 전법을 수행으로 삼으신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다. 우리가 전법을 최상의 공덕으로 삼는 이유도 전법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대한 보답이요, 전하는 사람도 전해받는 사람도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이기 때문이다.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수좌들이나 강원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학인들, 그리고 율원에서 계행을 닦는 율원생들, 염불과 주력을 하는 기도스님들, 이 모두가 제각기 수행정진을 하고 있으나 그 목적은 언제나 중생제도와 교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전법을 위한 정진, 전법을 위한 수행인 것이다.
전법은 출가 수행자만의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자는 제각각 모두가 믿음을 가지고 수행을 시작하지만 수행을 하다보면 의심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우리는 전법수행으로 힘을 삼아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해야 한다. 본인 스스로가 작은 체득부터 해갈 때 큰 성불의 믿음이 다가온다. 재가자로서 바른 신심과 원력으로 정진하는 것도 전법이 될 수 있다. 불자된 자세가 바로 불교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전법과 깨침은 둘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한하다. 우리는 한평생을 두고 공부하지만 다하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배운 만큼 전해야 한다. 조금 적게 알면 어떠랴! 아는 것만큼 전하는 것이다. 좋은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알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전법과 깨침은 분명 둘이 아니다. 깨친 자는 그 법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전법하는 중에 또 다른 깨침은 다시 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내려오는 수행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일 것이다. 각자(覺者)가 되기 위한 정진력과 함께 중생을 교화시키는 노력 역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남을 보살핌이란 가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다. 가족과 이웃, 사회와 국가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다. 나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이요, 우리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 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이웃들과 최고 행복의 길을 걸으신 부처님의 길을 따라 함께 걷도록 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 법을 배운 자가 신심이나 체득으로 정진해 나간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은 따를 것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역시 다른 데가 있구나!” 할 때 전법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거룩하다. 세 확장을 위한 ‘포교(布敎)’보다는 거룩한 불교의 가르침, 불교의 진리를 보다 많이 펴고자 하는 ‘전법(傳法)’을 최상의 수행이요, 최상의 공덕으로 삼아 정진해가야 할 것이다.

본공 스님은 혜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 중앙승가대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군법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고, 봉암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정진하였으며, 현재 불광사 불광법회 총무와 포교담당 소임을 맡아 전법수행하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