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여성불교] 바바라 로즈

숭산 스님 인가 받고 프로비던스 선원 이끄는 여성법사

2007-10-07     진우기

미국 동부의 로드아일랜드 주에는 숭산 스님이 미국 최초로 세운 프로비던스 선원이 있다. 아름답고 넓은 숲에 둘러싸여 있는 선원은 새벽 5시부터 아침예불이 시작되고 이어서 108배를 하고 다시 30분의 좌선이 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아름다운 예불로 기억된다고 한다.

1948년 태어난 바바라 로즈(Barbara Rhodes 법명 Soeng Hyang)는 이 프로비던스 선원의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에도 선원에서 살면서 선원과 역사를 함께 한 사람이다.

1977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978년 미국 최초로 임명된 2명의 수석법사(이후 지도법사로 명칭이 바뀜) 중 하나가 되었고, 1992년 전법을 받았다. 법사로서 선을 가르치는 외에도 프로비던스 선원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시작했던 그녀는 간호사 일과 호스피스 일도 계속 했다. 그녀의 모습은 직접적이고 전혀 꾸밈이 없으며 온전히 인간이다.

‘모른다’로 곧바로 가라

아버지가 해군이었던 그녀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삶의 무상성을 어려서부터 체험한 셈이다. 특히 5학년 때 막 사춘기를 시작한 11세의 소녀로서 1년에 3곳으로 이사다니며 3곳의 다른 학교를 다녔던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늘 싸웠고 어머니는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다.

숭산 스님이 늘 말하듯이 나쁜 상황이 즉 좋은 상황이다. 너무나 나빠서 좋은 상황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라고 질문할 수 있었으니까.

엄마가 매우 편찮으시면 바비에게 도움을 청했다. 간호 일에 카르마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숨을 쉴 수 없는 어머니를 돌보러 불려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간호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수다떨고 파티 가는 일엔 취미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불교적 카르마라 부르는 새벽에 일어나기가 이미 시작되어 4시 반이면 일어나서 공부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직업을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생활이 공허해보였다. 그래서 평화봉사단에 자원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지명을 받으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멕시코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에 자원했다.

자라면서 다닌 성공회의 교리는 이젠 그녀에게 죽은 가르침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사이키델릭 문화에 동조되면서 그녀는 살아있는 신을 체험했다. 마약은 그녀에게 명상과도 같은 것으로 의식이 맑아져 궁금하던 것의 답을 일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후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졌고 같은 현상만 되풀이되었다. 그 때 스즈키의 불서를 통해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을 가르쳐 줄 선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부모가 은퇴하여 로드아일랜드주로 정착하자 그녀도 그 곳으로 갔다. 그런데 자신의 바로 아래층에 세탁기를 수리하는 숭산 스님이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숭산 스님은 최소한의 영어로 그녀에게 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녀는 매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좌선을 배우게 되었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이 참여했다. 당시 병원의 야간근무조였던 그녀는 밤 11시에서 아침 7시까지 일을 하고는 바로 선원으로 와서 아침예불과 좌선을 했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다시 불교센터로 가서 예불을 하고 1시간 반 동안 좌선을 했다. 그러고 나서 2시간 정도 자면 숭산 스님은 그녀를 깨워 ‘출근해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주말에는 법문이 있었다. 숭산 스님이 일어로 말하면 누군가 영어로 통역을 했다. 서서히 그녀는 명상 중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다. 숭산 스님은 호흡법이나 화두를 강조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저 “‘모른다’로 곧바로 가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라

평소 자신이 여성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던 그녀지만 그래도 남편 링크와 함께 숭산 스님을 따라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위협받는 여성의 자아를 느꼈다.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로비던스선원의 주지직을 맡았던 남편보다도 먼저 관음선종의 수석법사가 된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그리고 프로비던스선원에서 열린 큰 국제회29의에서 그녀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로즈는 언제나 링크의 아내였을 뿐이고, 링크가 소개된 다음에야 소개되었다. 그녀는 “나도 알아줘. 나도 링크만큼 중요한 사람이야.”고 소리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또한 숭산 스님이 매우 한국적 태도를 취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제자라기보다는 하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로즈는 채식주의자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라’는 숭산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즉 지옥에서 신음하는 사람을 구하려면 우리가 먼저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 추수감사절에는 어머니가 정성껏 요리한 칠면조를 함께 먹었다. 부모님은 정말 기뻐하셨다. 그 후 부모님이 프로비던스선원을 생애 최초로 방문하고 그 곳에서 식사도 했다. 로즈는 또 부모님과 함께 몇 십년 만에 처음으로 성당에도 갔다. 그 곳에서 성찬식을 하며 성체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그랬더니 또 다른 벽이 무너졌다. “먼저 내가 그들의 팀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세월이 흘러 로즈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이혼하고, 20년 가까이 살던 선원 내부 숙소를 떠나 시내로 나와 살고 있다. 이제 프로비던스선원에는 1년에 한 번만 가르치러 간다. 대신 사람들이 그녀의 집 지하실 선방으로 1주에 1번씩 명상과 독경을 하러 온다. 로즈는 현재 풀타임으로 로드아일랜드 호스피스에서 일하고 있다. 1999년 그녀는 뇌졸중을 일으켜 심장절개수술을 받았다. 2년의 긴 회복기에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도움받는 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 동안 얼마나 ‘돕는 자’ 쪽으로 편중되어 균형을 상실했었는지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전보다 더 마음의 여유를 느낀다.

호스피스 일, 즉 말기환자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면서 그녀는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 체험을 그녀는 수련회 참가자들에게 자주 이야기해준다. 이제 그녀는 법문이나 강연에서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고심하지 않는다. 그저 그 날의 체험을 느긋하게 이야기하며 불교의 진리와 연관시킬 뿐이다. 사람들이 로즈라는 이름에 제일 먼저 떠올리는 단어인 ‘정직한’을 삶으로 보여주면서, 자신의 체험을 기꺼이 나누고 늘 대화하며 누구도 무시하지 않는 로즈로, 잘난체하지 않는 로즈로 그녀는 오늘도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법을 가르치는 법사는 최고수 광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수 광대는 이미 행복한 사람을 웃게 만든다. 중수 광대는 슬픈 사람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고수 광대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를 웃게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고수 법사는 고수 광대가 될 수 있다. 고수 광대는 이미 고수 법사이다.

스승 숭산 스님이 그렇게 아낌없이 전해준 가르침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그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바바라 로즈(성향 법사)는 선원에서 가르치는 일과 세상에서 사는 일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나 구별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결국 수행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바라 로즈가 법사로 재직한 프로비던스 젠 센터. 사진=http://providencezen.org/
바바라 로즈가 법사로 재직한 프로비던스 젠 센터. 사진=http://providenceze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