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사랑의 존재로 회향하리

특집/ 원력

2007-10-07     관리자

며칠 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퍼붓는 비가 내렸다. 기상대에서는 한 달간 내린 장맛비보다 더 많이 내렸다고 한다. 전자 제품들이 낙뢰를 맞았는지 망가진 것이 많아 수리신청을 해서 며칠 전부터 사람들이 자주 온다.
오늘도 아내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인터넷 수리를 하러온 젊은 청년이 왔기에 같이 먹자고 하니 스스럼없이 식탁에 앉는다. 우리 집 음식은 아내가 건강을 위하여 만든 현미밥과 농사를 지어서 먹는 자연식이라고 하니, 청년은 전라도 어느 섬이 고향이라며, “두 번째 뵙는 분들이지만 꼭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행복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분처럼 노후를 맞게 될까요?” 하고 묻는다.
모든 뜻의 이치를 알아서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맞게 살았는지, 요즈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며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자신에게 되묻는다.
20~30대에는 어떻게 하면 도예가로서 성공할 것인가 하여 세 가지의 원을 세운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의 청자, 세상에서 가장 큰 청자,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청자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자기를 시작한 지 4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서원은 이루어져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칭호도 받았다.

‘나’를 없앨수록 도자기의 혼은 더욱 살아나고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 자신을 없앨수록 더욱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 수가 있다. 어느 때는 내가 도자기를 빚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에너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어떤 힘이 스스로 작용하는 것을 체험했을 때, ‘나’라는 것을 없앨수록 더욱 혼이 실린 예술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럴 때마다 부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피임을 느끼며 두손을 모은다.
젊은 시절 어리석게도 내 힘으로 도자기를 만들겠다며 부딪치고 덤볐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도자기는 우리의 삶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다. 흙을 고르고 빚고 무늬를 새기고 말리고 굽는 도예의 과정이 온갖 우여곡절로 인하여 만들어진다. 어려운 고비를 거치고 나서야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 태어나는 것처럼 이승에서의 나도 수많은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성숙해진 것이 도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음생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도자기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일했는지, 얼마나 자신을 잊고 몰입하여 흙을 대했는지는 1,300도의 불에 심판을 받고 가마의 문을 열었을 때 도자기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거짓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이생을 하직한 후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지는 매일매일 어떤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도자기와 내가 하나이고 내 모습이 도자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도자기와 늘 함께 살다보니 마음이 많이 정화가 된 것이 아닐까라고 평생 도반인 아내에게 물으니, 그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를 바꾸게 한 것은 40대 초반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겠다는 큰 원을 세우고 정진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 때는 재가불자지만 스님 흉내를 내며 오신채도 먹지 않고 금욕생활을 하며 낮에는 도자기를 만들고 밤이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열심히 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근기가 덜 된 탓일까? 아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는지 상기가 되어서 ‘무(無)’자를 집안 곳곳에 붙이고 심지어는 옷에다까지 새기며 모든 것을 놓으려고 했던, 그 지루한 10여 년의 시간은 참으로 힘든 세월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내가 놓고 말고도 없었던 일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또 다른 모습의 내가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인연이 다하는 그 날까지

2000년 겨울에 아내의 병을 고쳐주고자 티베트의 망명지인 북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 산 속에서 무문관을 하고 법을 펼치신다는 성자님이 계신다기에 그 곳에서 수행하는 한국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찾아뵈었었다. 그 때 아내가 무조건 떼를 쓰며 고쳐달라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칠 때, 그 분들로부터 받았던 무조건의 자비심이 아내를 새로 태어나게 하였다. 그 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우리 부부는 그 곳에서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내는 지금도 가장 행복했을 때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바로 그때라고 한다.
그 후 나와 아내는 ‘자비존’이라는 사랑채의 집을 만들었다. 2001년 어느 봄날 한국에 오셨던 티베트의 네충 꾸텐라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한국어와 영어의 합성어이며 ‘자비구역’이라는 뜻이다. 자비존은 우리가 받은 자비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지었던 집이었지만 그 집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 가족들이 받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곳에 머물렀던 분들이 다녀가시고 나면 자비의 향기가 오래도록 남아 나와 가족들은 마음이 정화가 되고 행복해져서 삶의 새로운 활력소를 얻고는 한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내 모습이 편안해졌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번 생에 나는 많은 원을 세우고 실천해보았다. 이제 내가 이루고 싶은 원은 지금까지의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서라도 도반인 아내와 20여 년 가까이 해오던 반야심경 사경 수행을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하면서 친절과 자비심을 실천하는 빛과 사랑의 존재로 회향하고 싶은 것이다.

김세용 님은 경기도 이천 세창도예연구소 대표. 부처님 그늘에서 부인 보덕행 보살님과 함께 수행하며 천년 비색을 자랑하는 고려청자의 빛깔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상감기법으로 도자기를 구워내고 있는 대한민국 명장(02-22호)으로, ‘좋은 도자기를 구우려면 신심깊은 김세용 씨에게 가보라’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로 신심 돈독한 불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