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귀의처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 이야기

2007-10-07     관리자

마음공부란, 단적으로 말하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마음공부를 원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순간순간 무엇에 집착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집착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의존심리(依存心理)입니다.
사람에게는 뿌리 깊은 의존심리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의존할 때 평안이나 기쁨을 얻는 심리이지요. 사람은 스스로 탄생하지 못합니다. 우선 어머니의 태가 있어야 하고, 그 태에서 10개월간이나 몸을 의지해야 합니다. 무수한 전생은 차치하고라도 금생에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태에 의지하고 있는 과정에, 그리고 태어나서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과정에 우리들의 의식 깊은 곳에 의존심리는 충분히 뿌리내려 져버립니다.

의존심리
의존심리란 나의 생존을 위한 힘의 근원을 그 무엇인가에 두는 심리이지요. 어떤 의존심리가 길러지면 그 의존의 대상이 없이는 괴로워집니다. 사람의 마음이 홀로 서기를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의존해야만 된다고 느끼는 것을 마음공부 차원에서는 미성숙하다고 합니다.
의존심리는 사람 일반에게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도 있고, 특정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들도 있고, 퇴폐성을 띤 병리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의존한다든가 교통수단에 의존한다든가 혹은 종교에 의존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대체로 보편적인 것으로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공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도 그 정도가 심해지면 병리적인 중독(中毒)성을 띠게 됩니다. 심한 의지, 심한 사치, 심한 독선 등의 병리적인 의존심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부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의존심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이를 척결, 지양해야 합니다. 의존심리야말로 중대한 업장이니까요.
인류 역사를 조감해볼 때 사람의 의존 대상은 다양했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첫 의존으로부터 아버지, 가족, 친척, 소속집단, 국가, 돈, 권력, 명예, 각종 오락, 알콜, 마약 등에 의존을 해왔으며 종교나 사상적인 의존으로는 나무, 산, 강, 바다, 태양, 불, 바람, 여러 종교적인 우상 등의 유형적인 토템에 의존하고, 조상신, 귀신, 그리스나 로마를 위시한 각 나라에서 섬겨온 다신 형태의 무형 신들에게 의존하고, 급기야는 우주 창조신, 유일신, 범신(汎神), 혹은 다양한 인격신에 의존하고 무수한 신념체계나 사고방식에 의존하여 어떤 이익이나 평안을 성취하고 있지요.
이상의 것들이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면, 대상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의존하고자 하지요. 자기라는 것이 무상하고 불완전하므로 무상하지 않고 불완전하지 않는 어떤 참자기〔眞我, 아트만〕를 상정하여 의존하기도 합니다. 실은 참자기라고 하는 것도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무엇일 터, 결국은 그것도 대상에 불과합니다. 인도의 가장 전통적인 사상 속에 압축적으로 들어 있는 의존의 대상은 아트만(참자기)과 브라마(우주창조신)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의존심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일단 최소한 이상의 병리이자 심한 병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청되는 것으로는 모든 의존을 완벽하게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궁극의 귀의처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의존을 완벽하게 놓아버리는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람이 힘주어 집착할 만한 실체성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절대적인 진리 말씀인 삼법인(三法印)을 떠올려보십시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곧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 혹은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인 것이지요. 무아(無我)라는,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이라는 것이 일단 교리적으로 깨달아지고 명상을 통하여 체험이 되어질 때 석가모니에 대한 고마움은 극에 이릅니다. 아공을 깨닫고 자아를 방하(放下)하며, 법공을 깨닫고 일체 대상을 방하하는, 대부정(大否定)의 터널을 통과할 때 결코 부정(否定)되어지지 않는 대긍정(大肯定)이 현전(現前)합니다. 주객(主客) 일체를 다 방하할 때 현전하는 것, 곧 묘유(妙有)입니다.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요. 필자는 불교를 만난 감사함 중 방하의 가르침을 최고의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궁극의 귀의처는 유형ㆍ무형의 그 어떤 것도 아닌, 그 모든 것을 관심 밖으로 내놓았을 때에도 끝내 소소영령하게 현전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해탈감일 수도 있고 자비심일 수도 있고, 걸림 없는 자재(自在)로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깨어있음이요, 그냥 존재함이요, 그냥 사는 것입니다. 마조 스님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셨지요. (필자가 사반세기 동안 이끌어온 수련 프로그램의 고급과정에서는 그냥 깨어있음, 그냥 사는 것을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체감시키고, 체감되어지는 그것이 가장 본질적으로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몸을 보호하는 옷이란 어떤 색깔의 옷이라도 색깔이 칠해지기 전의 원단만으로 옷의 기능을 함에 충분하듯 우리의 인생도 원단과 같은 최대 공약수치의 생활 수단이면 됩니다. 원단만으로 충분한 줄 아는 사람은 옷의 색깔을 좇아 분주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색깔을 쫓아다니느라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소중한 생명 에너지를 소진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시대는 원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습니다. 말세라는 말이 있는데, 말세란 바로 원단에서 멀어진 정도만큼의 세태를 말할 것입니다. 즉 필요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심리만큼 말세요, 타락이지 않겠습니까? 불필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 시대를 욕망의 왕국이라고 갈파하는 선각들이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시대 진단의 말씀입니다.
욕망의 최소화 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의 최소 단위인 무소유심리(無所有心理)가 무엇인가를 간파해야 하고, 그 간파가 얼마나 위력적인 의미가 있는가를 깨달아 이를 문화운동으로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안으로 갈 곳 없고
밖으로 갈 곳 없으니
이대로 깨어있는 일이 내 할 일 전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