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여성불교] 토니 패커(Toni Packer, 1927~ )

선불교의 새로운 역할 모델

2007-10-07     진우기

뉴욕주 로체스터 시에 있는 제네시 계곡선원(Genesee Valley Zen Center, GVZC)은 1982년 당시 필립 카플로 노사가 설립한 로체스터 선원의 법계승자로 지정되었던 토니 패커가 스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독립하여 세운 선원이다. 그녀는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지 한 선원만의 특이한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즉 현대 미국이라는 특정지역에서 선불교는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분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토니 패커는 지극한 고요함만이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GVZC에서는 원하는 사람에게만 화두를 들게 한다. 그리고 그 화두도 전통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남자는 계속해서 많은 여성들과 사귀었지만 진정한 관계를 한번도 이루지 못했다. 그의 화두는 “사랑이란 무엇인가?”가 되었다. 그리고 초심자들에게는 몇 개의 화두의 예를 제시한 다음 친숙하게 느끼거나 절로 다가온 것이 있느냐고 물은 다음 그것을 화두로 내어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장 절절하게 느끼는 문제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탐구하기 때문이다.

선(禪)과의 만남 192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패커가 6살이 되었을 때 히틀러가 집권을 했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집안에는 두려움이 감돌았다. 신변보호를 위해 토니와 언니는 루테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전쟁의 와중에서 어린 그녀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왜 이런 폭력을 용인하는가, 또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했다면 왜 자신은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는가 등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화두처럼 붙들었다. 후에 이주한 스위스에서 그녀는 1950년 카일 패커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버팔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조셉 캠벨의 『신의 가면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여성성과 화해를 했다.

그녀는 여성성이 문화에 직결되어 있으며, 이전에는 여성신들이 높은 위치에 있던 적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사와 전차군단과 기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서 힘으로 더 남성적이고 압박적인 종교체계를 세우기 전에는 그러했다. 그녀는 이제 그 문제를 원망 없이 보게 되었고 다만 상대적인 훈련된 개념으로 보았다.

양성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성은 남성의 압박을 두려워했고, 남성은 여성을 두려워했다. 그런 와중에 토니는 앨런 와츠와 다이세츠 스즈키의 책을 통해 불교를 만났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이 가져온 필립 카플로의 『선의 세 기둥』을 보다가 생애 최초로 명상법을 접했다.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무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기쁜 마음에 명상을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정기적으로 혼자 명상을 했다. 그러다가 카플로 노사가 설립한 불교센터에 가보았다. 그 곳에도 불상이 있었지만 누구라도 원한다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부처였다. 더욱이 부처는 신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이었고 불교수행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신선한 만남이었다. 선불교는 꼭 집어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늘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발견한 격이었다. 그녀는 온몸과 마음을 바쳐 선에 뛰어들었다.

선센터의 정체성 찾기

그녀는 절이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나올 수 있음을 배웠다. 제단이나 스승과의 독참에서 하는 절은 공(空)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녀에게 와서 절을 할 때면 의문이 생겼다. 그들은 그녀를 명확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자신들의 위에 있는 이미지로 보고 있는 것일까? 또한 그녀 자신이 그렇게 올려진 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절을 하는 학생과 받는 자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을까? 독경과 염불은 또 어떤가? 종류도 많고 연이어 여러 번 빠른 속도로 반복되는 그것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의미가 중요하다면 말을 더 천천히 하는 것이 기계적인 암기나 반복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그녀는 또 참선 중 죽비로 어깨를 치는 경책의 효과에 심히 회의적이었다.

그런 매는 맞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또 치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녀는 비난과 사회적 매장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정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인정받은 스승의 법계승자라는 편안한 명예를 차버리고 자신의 센터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법을 가르치는 고독한 길을 선택하였다.

1983년 GVZC의 최초 총회에서 그녀는 센터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센터의 존재가 그에 속한 개개인이 미혹 없이 자신을 이해하고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는 데에 있으며, 센터 자체가 봉사하기 위해 조직된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지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센터 자체가 자존심과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고, 이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우리 마음과 몸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이상(理想)이란 본래 없는 것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녀는 단단히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좋고 이상적인 어머니라는 이상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상이란 그렇게 무가치하고 맹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이상을 만들고 그것에 귀의하는 것이다.

1984년 GVZC는 뉴욕주 스프링워터에 수련장 부지 284에이커를 매입하여 스프링워터 센터를 지었다. 1998년 스프링워터 센터는 이제 옛 상처를 다 잊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카플로 노사도 이 곳을 직접 방문하여 격려를 하였다. 그리고 이 곳은 새로운 수련회의 형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선 오후의 좌선은 자유롭게 오고 가며 원하는 시간만큼 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을 빼고는 아무 것도 꼭 해야 하는 것은 없다. 토니가 다른 곳으로 법문을 하러 가면 스태프만으로 수련회를 하기도 한다. 또한 1년에 몇 번의 수련회는 토니가 다만 참가자 자격만으로 참여하는 것도 있다. 매일 오후 90분 정도 토론회가 열린다. 이 수련회는 점점 더 많은 참여를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체험도 세월과 함께 변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언제나 힘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무서웠다. 열정적이었던 어머니는 분노도 많았고 사랑도 많았다. 언젠가 스위스에 갔을 때 나는 나를 향해 식당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냥 그렇게 서있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그대로 어머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없었고,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이미지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순수한 사랑만이 남아있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변했다. 이제 새로운 친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