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여성불교] 샌디 바우처

관세음보살과 사회운동

2007-10-07     관리자

샌디 바우처(Sandy Boucher)는 여성 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다가 불교를 만났다. 운동권 여성과 불교가 만났다면 좀 안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녀는 그 두 가지가 천생연분처럼 잘 맞는 한 쌍이라고 말한다. 지난 20년간 위빠사나 명상을 하고 티벳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운동을 하는 것과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명상과 공부를 통해 내밀한 곳의 자신과 하나가 되는 행위가 서로를 보완하고 힘을 실어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여성운동으로 인해 미국불교가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변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샌디 바우처 같은 사람은 미국불교라는 특수성의 일면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미국불교 연구에서 꼭 한번 접하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다. 재가중심의 미국불교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불교센터의 행정과 살림을 맡고 있고 또 여성 법사 및 선원장도 많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연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절의 엄격한 수직적 계층구조가 수평적 구조에 가깝게 변형되기도 했다. 수행센터나 사원의 구조 역시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구조에서 남성, 여성이 함께 공동체를 키워가는 구조로, 여성법사를 키워내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여성이 더 강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로운 해외 사원이 생길 때는 그 곳 회원들이 여성주지나 여성선원장을 원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여성법사들을 양성할 필요성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지게 되었다.

신불교를 창조하는 미국여성들

샌디 바우처는 이렇게 서양불교의 일선에서 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여성들을 일찍이 주목했고 그들이 일하고 있는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100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삶과 그들의 삶에 깃들어있는 불교의 의미를 담은 책, 『법륜을 굴리다: 신불교를 창조하는 미국여성들』을 1988년 펴냈다. 이는 불교계 여성들의 다양한 활동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고 또 서로의 존재를 알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저술이었다.
그녀의 이 저술은 깊은 의문속에서 움터나온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깊은 산속에 있는 타사하라 승원에서 불교명상을 처음 접한 그녀는 가르침과 수행에는 깊이 매료되었지만 시스템과 방식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불교계 역시 다른 종교권과 마찬가지로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집단 같았다. 왜 2500년 역사에 위대한 여성수행자의 이름이 없는가? 왜 여성은 한 번도 범종을 울리지 않는가? 왜 남성은 눈에 띄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여성은 보조역할만을 하는가? 이후로 그녀는 혁신적인 여성 재가법사 루스 데니슨에게 명상을 계속 배우면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80년대 초 제2차 미국여성불자대회에서 남성법사들이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여러 건 불거지자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마음공부의 법맥 안에 존재하는 모순에 도전하여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자신의 내면과 여성들의 내면에 충분히 축적되었다고 생각하고 기쁘게 저술작업을 시작했다.


모든 생명이 해탈할 때까지

그러다가 그녀는 캔자스 시티의 한 박물관에서 여성의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상을 처음 본 후 그에 매료되었다. 밤낮으로 관세음보살의 모습만을 생각하던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면에서 불교에 끌렸던 초기 불자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삶의 역설을 느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비의 여신 관세음보살은 이후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 그녀는 영어권에 얼마 되지 않는 관세음보살에 관한 문헌을 뒤지면서 공부를 했다.

그녀는 보살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며,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직전에 세상 속으로 다시 몸을 돌려 ‘모든 생명이 다 해탈을 얻을 때까지 나는 해탈에 이르지 않겠다’는 각오로 뭇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는 여성’이라 불리며 따라서 관세음보살의 이미지가 사회운동과 어렵지 않게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1983년 핵무기 반대 데모를 하러 가기 전에 그녀의 그룹은 ‘자애’ 명상을 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정신에 맞추어 모든 생명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떠올렸고, 그 속에는 자신들을 체포할 캘리포니아 대학 경찰관과 핵무기 제조에 생계가 달려 있는 무기공장 직원들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백 명이 함께 하는 데모 중에 때로 혼란스럽고 난폭한 상황에 접할 때라도 비폭력적인 언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전에 명상을 했던 것이다.

이후로 관세음보살은 그녀의 삶에 여러 번 다시 등장했다. 마침내 어느 날 관세음보살의 성지인 중국의 보타락가산으로 성지순례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절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렀다. 집 근처의 묘지로 가서 관세음보살을 외쳐 부르며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진심으르 다해 기도했다.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그녀가 기대한 것처럼 근처의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자비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아주지 않았다. 그 때 그녀는 관세음보살이 밖에서 구하는 어떤 불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구하고 찾아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후로 그녀가 암을 이겨낼 때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관세음보살은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는 관세음보살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속에서 깊이 함께 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을 재난에서 구하고 소원을 들어주고 보살펴주는 관세음보살은 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근처에 머물며 자비심을 가르쳐주는 신격이었다. 이후로 현대를 살아가는 미국 여성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발견하려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관세음보살 수련회를 이끌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전지전능한 아버지 같은 신과 일대일의 ‘나-너’ 관계를 이루는 것에 회의적이던 여성들은 관세음보살 안에서 자신 안의 자비를 일깨우고 지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얻고, 상처를 치유하며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았다.

“눈부시게 투명한 흰빛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신 관세음보살은 왼손에는 자비의 물이 담긴 하얀 물병을, 오른손에는 성스러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서있네. 그녀는 드넓은 바다에 뜬 향기로운 붉은 연꽃을 딛고 서서 물병으로 감로수를 뿌려주며 세상 곳곳의 모든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네. 수천 개의 마음으로 기도에 답해주고 영원한 자비의 서원으로 기도를 들어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