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양거사의 섬기행] 진리와 자비의 섬 거금도

망양거사의 섬기행

2007-10-07     관리자

역사를 간직한 섬 거금도
거금도로 가려면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녹동 항에서 배를 타야 한다. 고흥 땅은 우리나라의 농촌풍경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토종 농산물을 지키는 향수의 녹색벨트라고나 할까. 풋풋한 마늘밭과 보리밭, 여기저기 모내기를 하는 목가적 풍경이 나그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고장이다. 어디선가 서편제 가락이 들려올 것만 같은 남도의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거금도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는 유서 깊은 섬으로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김, 굴 등의 양식업을 많이 한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로 곳곳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절이도(折爾島)라 했으며 말을 기르는 목장의 하나로 사용되었던 섬으로 지금까지도 목장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에 이순신 장군이 절이도 북방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여 서진해 오는 왜군의 배 50여 척을 격파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금산면 신촌리의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면 멀리 금당도가 보이는데 이 근처 바다가 바로 절이도 해전의 현장이다.

송광암 가는 길
토요일 저녁 7시 반에 출발하는 카페리 도선을 타고 거금도로 향했다. 노을 지는 녹동 항의 방파제를 빠져나오니 소록도와 거금도 사이의 물길인 거금수도(居金水道)가 노을빛으로 물든다. 환우들을 보살핀 사랑의 섬 소록도 해변을 끼고 내려가니 금세 진리와 자비의 섬 거금도가 나타난다. 녹동을 출발하여 약 20분 정도 지나서 거금도의 관문인 금진 항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물어 버렸다. 만행을 하는 나그네야 발길 닿는 데마다 모두 내 집 아닌 곳이 없지만, 어둠이 밀려오는 황량한 포구에 서니 마음은 이미 송광암(松光庵)으로 달음질친다.
택시를 타고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을 지나 산자락을 오르는데 섬이라기보다 깊은 산중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에서 길이 끝났다. 그 곳에 꿈에 그리던 송광암이 있을 줄이야. 어둠을 헤치고 당도한 송광암은 섬 속의 섬이었다. 염치없이 밤중에 산문을 두드렸지만 스님들은 반갑게 맞아주셨다. 요사채 건물인 청운당(靑雲堂)에 마주앉아 손수 뽕잎차를 달여 주시며 잔잔한 덕담을 해주시는 진호, 현학, 월인 세 분의 스님이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먼저 와 계시던 남자 신도 두 분도 함께 한 자리였는데, 이 분들과는 구도자의 길을 함께 갈 도반이 되기로 약속했다.

하룻밤 수행
밤이 이슥할 즈음 월인 스님은 우리를 이끌고 별채인 이우선원(泥牛禪院)으로 올라가 하룻밤 육신을 눕힐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님은 나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일러 주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거금도로 들어오면서 차를 타고 밥을 사먹고 다시 배를 타고 온 것 자체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내가 덕을 베푼 것이란다. 그리고 나는 아무개의 아버지이며 다른 아무개의 남편이고 또 다른 누구의 고모부이고 조카이고… , 그래서 내 한 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조그만 방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으니 그 인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새벽 3시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탁소리에 일어나 극락전으로 가서 새벽 예불에 참석했다. 먼 여행길에 육신은 피곤하지만 마음이 이렇게 가뿐할 수가 있을까. 예불이 끝나고 한참을 극락전에 앉아 나 자신을 들여다보니 찬란하게 밝아오는 새날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경내 곳곳에 꽃망울을 터뜨린 함박꽃도 이미 어제의 그 꽃은 아니었다. 월인 스님이 말씀하신다. 사물을 바라볼 때 욕망이 개입되지 않으면 움트는 나뭇잎 하나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보인다고…,

송광암을 떠나오면서
송광암은 고려 신종 3년인 1,209년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창건한 3송광 중의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보조국사가 모후산(母后山)에서 절터를 잡고자 나무로 만든 세 마리의 새를 날렸는데, 한 마리는 현재의 순천 송광사 자리에, 다른 한 마리는 여수 금오도에, 나머지 한 마리는 거금도 송광암에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다. 송광암은 용두봉 정상 아래 아담한 곳에 자리하고 있고 부처님을 모신 극락전이 멀리 바다를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암자 입구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자라고 물이 샘솟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절터는 아닌 것 같다. 송광암은 언젠가 꼭 다시 와서 며칠 쉬었다 가고 싶은 편안한 절이다. 겨우 하룻밤을 묵고 떠나오는데도 자꾸만 뒤돌아보아지는 연유가 무엇일까. 본격적인 일철을 맞이한 길가엔 순박한 농부와 어부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는데, 월인 스님이 차를 몰아 환상적인 해변이 있는 뱃머리까지 배웅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