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자리의 마음챙김

초대설법

2007-10-07     관리자

이 글은 1974년 6월, 영국을 초청방문한 아짠 마하 부와가 런던의 담마빠디빠 사원(Dammapadipa Vihara)에 머물면서 12일에 걸쳐 행한 법문과 수행자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들을 모아 엮은 법문집, 『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런던 편(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의 첫 번째 법문 질의 응답 내용입니다.

문 : 호흡관찰 수행시 주의를 코 끝과 배 중 어느 쪽에 집중시켜야 하는지요?

답 : 호흡관찰 수행시에는 마음챙김(sati, mindfulness)* 을 확고히 하여 숨이 닿는 지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호흡을 좇아 들락날락하지 말고, 마음을 숨이 닿는 지점에 계속 고정시켜야 합니다.
호흡이 점차 희미해져 스러져 가는 듯 느껴져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작 호흡은 멎지 않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까요.
명상수행의 유형은 수행자의 개별 성향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지만 호흡관찰 수행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에게 적합한 수행법입니다. 어떤 유형의 마음수행이든 그 핵심요소는 마음챙김입니다. 마음챙김의 흐트러짐은 곧 수행의 그르침을 뜻하므로, 수행자는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늘 마음챙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어떤 유형의 마음수련을 하든 지금 이 자리의 마음챙김을 놓치지 말고 끊임없이 지속시켜 나가야 합니다.

문 : 좌선을 할 때면 이마 뒤편을 무언가 잡아당기는 듯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요? 이마의 근육들이 땅겨서 두통이 일곤 하는데요. 이런 증세를 치유할 방법은 없는지요?

답 : 그런 증세를 일으키는 요인인 긴장을 완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오직 호흡에만 집중시키십시오. 너무 긴장하면 두통이 일게 됩니다. 마음의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대는 맹렬하게도 혹은 느슨하게도 집중할 수 있으며, 그 같은 집중력의 정도에 의해 수행의 성과도 좌우될 것입니다.

문 : 불자(佛子)가 된 이후로 친구들은 저에 관해 수군거리곤 합니다. 제가 예전에는 재미있고 활달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변했다면서… 자연히 저는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었고, 심지어는 제 아내마저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부 사이도 소원해져 버렸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답 : 불자라고 해서 과묵해져야만 하거나 엄숙해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이 옳지 않은 길로 그대를 이끌려 할지라도 그대는 계(戒)를 지켜야 하며 그들에게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친구들을 잃게 될지는 몰라도 그대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 본보기로 붓다를 고찰해보십시오. 붓다께서는 한때 많은 신하들과 친지들을 거느린 왕자셨지만, 가족과 친지들을 버리고 세상을 등진 채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정진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단 깨달음에 도달하신 후에는 친지들에 둘러싸여 수많은 제자들(아라한, 스님, 신도들)을 거느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불자들의 마음을 합일시키는 붓다의 가르침들을 충심으로 신봉합니다. 따라서 친구가 없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친구들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멀어지게 되고 더 이상 교제할 수 없을 뿐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세상에는 아직 선량한 사람들이 존재함을 아십시오! 선량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로운 사람들은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선량한 사람들이라곤 없어 아무도 우리와 교제하려 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의 삼보(三寶), 즉 불(佛, Buddho), 법(法, Dhammo), 승(僧, Sangho)과 사귀도록 하십시오. 이들이야말로 선업(善業)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진실로 출중한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통례적으로 볼 때, 그대의 친구들 중 좋은 친구들은 다시 그대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마음속으로 확신한다면 안심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보다도 타인에게 더 관심을 갖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재든 미래든 간에 그대는 늘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대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문 : 저 역시 흡사한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불자가 되자 매우 상심하셔서, 다시금 기독교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매일 하느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을까요?

답 : 나의 어머니 또한 이번 영국 방문을 강력히 반대하셨습니다. 행여 내가 죽거나 어떤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영국 방문이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신했으므로 그 이유를 어머니께 잘 설명 드렸고, 어머니도 납득하시게 되어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불교는 결코 사람들이 서로 소원해지도록 가르치지 않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둘 다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천상에 이를 수 있도록 선업을 쌓으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례로 이곳 런던을 천상에 비유해봅시다. 런던에 이르는 길을 묻는다면 여러 갈래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 중 한 길을 택해 간다면 그들 모두는 런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어떤 종교를 갖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천상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에는 천상에 이르는 길뿐만 아니라, 열반(nibbana)에 이르는 길 또한 존재합니다. 불법의 가르침대로 깨우치고 실천하여 열반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피안에 이를 수 있는 길들로 안내해줍니다.
열반은 고(苦)의 완벽한 소멸을 뜻합니다. 붓다와 아라한 제자들은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셨기에 열반을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운 것은 사람들을 고양시킵니다. 이 점을 어머니께 잘 설명 드려 근심을 풀어 드리십시오.

문 : 제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제가 불자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만에 싸여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좌선수행을 허락 받기까지 무려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영적(靈的) 욕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 분야가 같은 이를 만나 친구가 되면 못마땅해하곤 합니다.

답 : 그대의 행위가 올바르며 어떤 그릇됨도 없음을 알게 된다면, 남편도 저절로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경우는 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들 중의 하나입니다. 계의 실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하기를 주저하곤 합니다.
우리가 어떤 올바른 행위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그것을 저지하려는 또다른 의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상충하는 의도들은 우리가 계를 이행하는 길로 들어서기 전에는 서로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타인들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통상적인 장애라 어쩔 수 없다 해도, 우리 스스로 만든 장애로 인해 자신과 투쟁하게 되는 불상사를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난제에 맞닥뜨리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의도가 저지당하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같은 장애는 해로울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행을 저지르도록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문: 어떤 행위가 옳지 않음을 알면, 우리는 자신을 제어하여 그 행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