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답을 알고 있다

함께 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10-07     관리자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사는 세상’의 모습을 자주 본다.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주도하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주기 위한 ‘We Start’ 운동, 나눔의 미덕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가게’ 등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지속을 개선하려는, 혹은 건전하고 도덕적인 소비를 통해 보람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런 민간 운동들은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훈기를 느끼게 해준다. 무한경쟁의 숨가쁜 속도와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직장생활, 집단이기주의와 님비현상이 여전한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이타행의 배려’는 여간 향기롭지 않다.
함께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했고,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고도 했다. 쉬운 일도 함께 하면 더 쉬우며,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에는 작은 힘이나마 서로 도우면 좋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돕는 게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함께 한다는 것은 제생명의 주체적 연대니, 공동체 삶의 윤리적 실천이니 하는 말로 어렵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또한 아주 단순해서 아름답다. 서로를 돕는 것이다. 도움은 생명의 기본 원리이다. 사람의 세포마다 들어 있는 23쌍의 염색체에는 무려 30억 개에 이르는 염기쌍이 배열되어 있는데, 이런 조합들이 일사불란하게 상호 도움활동을 하지 못하면 생명력에 장애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다. 모든 개체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 이 원리가 적용되며, 개체와 개체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나 아닌 모든 것들’과 도움으로 연대한다. 도움이 없는 삶이란 본질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세상’을 일구는 데에는 나는 곧 너이고 우리이며, 하나인 것은 동시에 여럿이고, 여럿인 것 역시 하나임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면으로부터의 깊은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들 삶의 본질이 도움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고, 그러면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의 배타적 차별에 감염되어 승리와 정복의 논리에 영혼을 저당잡히고 만다.
의식의 개혁, 내면의 깊은 깨달음이 없는 도움의 실천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머지 않아 원천이 고갈될 샘물과 같다. 도움의 진정한 실천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으로부터 나오며, 상대방을 자신 속에 그리고 자신을 상대방 속에 함께 껴안는 동체대비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緣起法)도 도움으로 함께 사는 삶의 본질을 묘파한 숭고한 가르침이 아니던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그러하며 인사(人事)와 자연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미움과 배척은 부메랑이 되어 정확하게 자신에게 돌아온다. 왼손이 잘못했다고 오른손이 왼손을 때리면 두 손이 함께 아픈 게 현실이다.
곪아서 썩은 것은 차라리 도려내야 하는 게 좋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제한으로 묶어두는 게 바람직하다. 사회적 악업(惡業)의 해소는 제거만이 능사가 아니다. 함께 아프고 감내하며 극복하고자 하는 중생구제의 보살도가 보다 지혜로운 방책이다.
무시와 격퇴, 증오와 반목이 종식되지 않는 인간사는 위대한 생명의 원리를 버리고 죽음의 원리를 따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으며, 또한 배려하고 즐겁게 해주는 일은 일상에서 쉽게 시작해볼 수 있는 이타행의 보살정신이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선업이 되고 개인의 선업은 물 속에 번지는 잉크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선업으로 확산시킨다. ‘함께 사는 세상’은 이렇게 쉬운 방식으로 일구어 나갈 수 있다.
최근에, 일본의 대안의학자이자 물 연구가인 에토 마사루의 저작 『물은 답을 알고 있다』가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도 새삼스레 음미해볼 만하다. 물을 향해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를 지속해서 전하면 물 분자가 아름다운 결정체를 형성하지만, 미움의 메시지를 보내면 보기 싫게 일그러진다는 주장을 수많은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이 책은 특히 서구사회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합일하는 삶의 미덕을 강조하는 동양의 전통적 세계관이 과학의 이름으로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사(人事)와 자연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함께 사는 세상’은 결국 생명사회 전체로 확산되어야 할 문제이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그 실천은 매순간의 선업이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선업이라도 구르다 보면 거대한 눈덩이가 된다. 여럿이 함께하면 할수록 선업의 덩이는 더욱 크고 아름다울 것이다.

홍기삼 님은 1940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일본 쓰쿠바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 「현대문학」 평론으로 데뷔, 1970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계간 「예술계」와 월간 「문학사상」 편집장을 지냈고, 1977년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연구교수, 일본 경도 불교대 객원교수를 거쳤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연구소장,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문화관광부 21세기 문화정책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동국대 총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상황문학론』, 『불교문학 연구』, 『문학사의 기술과 이해』, 『해금문학론』, 『임꺽정에서 화두까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