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있어 스승의 중요성

특집/ 스승

2007-10-07     관리자

불교 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이 수행이라면 수행의 완성은 스승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순종 속에 제자는 자신의 존재를 철견(徹見)하고 깨달음의 불을 밝히는 것이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와는 달리 자각의 종교이다. 신의 구원을 믿는 종교들은 다신교이건 일신교이건 상관없이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종교라고 한다. 신은 창조자이고 인간과 다른 생명들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주종의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는(물론 중국의 조상신 개념과는 다르지만) 영원한 피조물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자가 메시아이며, 이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하며 신의 대변자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스승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가 없다. 주종의 관계이거나 구원자와 구원을 받는 자의 수직적인 관계만 형성될 뿐이다. 구원자의 가르침도 신의 대변자이기 때문에 스승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일원론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절대신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논리이다.

불교의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반면 불교는 깨우침의 종교이다. 신을 믿어 천국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신 자체도 윤회의 한 부분이어서 영원한 행복이 아니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신의 대변자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은 신의 복속이 아닌 깨달음을 통한 대자유를 가르치신 분이다. 따라서 구원자가 아니라 길을 이끌어주는 인도자이며, 부처님 자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깨우치신 분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을 따라 수행하면 모두 스스로 부처가 되어 스스로를 구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절대신을 믿거나 또는 부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영원한 극락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며 직접 수행해서 그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과 같이 영원한 행복(열반)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스승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는 스승을 가장 중요시하며 그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법(진리)을 공부하고 따르는 것이다.
불교인의 삼대 의지처인 삼보, 즉 세 가지 가장 중요한 보배는 우리의 가장 처음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그리고 그가 가르쳐주신 법과 그 법을 따라 수행하시는 여러 역대 스승들인 것이다. 불교의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믿음이다. 법이라는 진실도 곧 스승에 의해 밝혀진 것이고 스승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고 또한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 없이 깨달음도 어렵다
불교의 모든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경전을 배우는 것도 스승의 가르침 없이는 알기 어렵다. 경전의 내용들이 모두 성인의 진실된 만남이고 논전 역시 역대 스승들께서 수행해서 얻은 법을 제자들을 위하여 설명해놓은 것들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세속의 욕망과 무명으로 어두워져 있는 안목으로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스승께서 조목조목 잘 분별해 주어야만이 잘못 보지 않아 삿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여 자기 업대로만 보고 업식을 더욱 키우게 될 뿐이다. 계율 역시 스승의 행을 보고 따르고 또한 율장을 스승에게 배우면서 부처님과 같은 원행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계율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을 하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어 자기 업식만 키워나갈 뿐이다. 선 수행 역시 화두간택이나 점검, 인가까지 스승 없이는 할 수 없는 공부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 만나기와 바른 법 만나기를 발원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 없이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스승의 중요성은 재삼 강조해도 넘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스승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연후에 “스승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끝내야 한다.”라고 하며 스승 없이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강조하셨다. 멀리로는 부처님과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 근래로는 나를 가르쳐주신 모든 스승들에 의해서 나의 공부가 진행되고 있다는 감사의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승은 스승다워야
요즈음의 한국불교의 풍토는 기복적인 성향이 강하여 스님네들을 복을 빌어주는 주술사 정도로 알거나 스승에게 해서는 안 되는 삿된 법들을 요구하여 죄를 짓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 반면 스님네들이 부처님 법을 말하기보다는 시주를 구하기 위해 삿된 짓을 행하는 일들은 모두 법을 구하고 법을 가르치는 정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모습들이다.
출가대중은 세속에 대해서는 법의 스승이어야 하고 세인들이 스승으로 대할 때 서로의 삶에 이익이 있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세속대중에게 스승 대접을 먼저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승답게 법답게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시주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든지 불교라는 이름으로 스승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고 있지 않는지 중생을 위한답시고 자기 명리나 바라고 있지 않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거짓된 스승일 뿐이어서 모든 사람들을 속이게 되며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재가자 역시 나름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신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스승을 찾아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하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사찰, 어느 지역 소속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스승의 제자이며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봉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스승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리우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소승에서는 아라한, 대승에서는 보살, 조사선에서는 선지식, 교종에서는 법사, 티벳에서는 라마 등으로 불리어졌으나 이 모두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상형의 수행자이며 스승인 것이다.
티벳 승가의 전언에 “스승은 마지막 성불까지 책임진다.”라고 하듯이 불교의 스승 개념은 그 어느 종파나 학파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마지막으로 티벳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는 스님네에게 그 죽음의 사선을 넘어서 왜 이 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두 말 없이 “달라이라마 스승님께서 계시며 법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우리 승가도 과연 그런지, 내 자신도 승가에 살면서 과연 스승과 법을 위해 사는지 부끄러울 때가 많다.

진옥 스님은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와 태안사 주지를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여수 석천사 주지, 문주종합사회복지관장 겸 환경운동연합상임의장으로 환경·복지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