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관(大願觀)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 이야기

2007-10-07     관리자

여러분에게 “평소 마음공부는 어떻게 하세요?” 하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와지십니까? 나에게 묻는다면 “주바라밀(主波羅蜜)로는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일심법계(一心法界)를 관조(觀照)하는 것을 주로 하고, 네 개의 조바라밀(助波羅蜜)과 여러 개의 세바라밀(細波羅蜜)을 닦습니다.” 정도로 답할 것 같습니다. 결국은 삼학-팔정도-육바라밀에 해당하지만 내 식으로 재편집한 행법이지요.
이번에는 세바라밀 중 하나인 대원관(大願觀)에 대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수행이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소멸하여 내재되어 있는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인데, 나는 대원관이 그 수행법의 하나로 대단히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원(大願)이란 글자 그대로 큰 바람, 큰 소망, 큰 희망입니다. 대원관이란 사무량심관(四無量心觀)이나 자비관(慈悲觀), 사홍서원(四弘誓願)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서 대원이 마음에 사무쳐지도록 관(觀: 명상)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제자는 법회 때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등의 사홍서원을 외칩니다. 참으로 귀한 맹세의 외침이지요. 우리 불제자들에게 대원의 마음이 충분히 뿌리를 내리도록 대원관을 수행해보시라고 간곡히 권장해봅니다. 대원관은 기도의 일종입니다. 이타적인 기도가 대원관입니다.
한 스승 밑에서 한 행법을 받았다고 해도 공부를 해가다 보면 개인 차가 나올 수밖에 없고 자기만의 길이 개척되어지게 마련입니다. 나의 경우 대원관은 가까운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선 한 분을 떠올리고 ‘행복해탈하세요. 당신의 행복해탈을 위해서 나를 바칩니다.’ 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 가는 곳에 기(氣)가 가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나의 관심과 사랑의 기운은 벌써 어머니에게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로부터 사랑의 기운이 대상에게로 전해지면서 대상이 밝아지고 맑아지고 행복해탈해지는 것을 상상할 때 나는 이미 어떤 지복감(祉福感)에 휩싸여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점점 대원관(기도)의 대상을 개인으로부터 집단으로 확산시켜갑니다. 가족-소속공동체-지역사회-온 국민-온 인류-온 중생-유정무정(有情無情)의 온 존재-태양계-은하계-우주-무한 우주 등등….
상상 속에서 무한 우주가 나의 대원의 대상이 되어 그만큼 더 정토화하면서 환히 빛나곤 할 때 나는 이미 법신불(法身佛)이 된 감을 번번이 느끼곤 합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대원관을 관행해보면 바로 공감, 지지할 것입니다.
일렀듯이 대원은 큰 희망이요, 큰 기도입니다. 사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그 자체로 나락(奈落)입니다. 욕심에 찬 희망이라도 없는 것에 비하면 탁월한 행복입니다. 보살의 원에 찬 희망은 행복 차원을 넘어선 수행이요, 청복(淸福)입니다. 탐진치를 제거하는 노력도 좋지만 큰 희망, 큰 사랑을 뿜어내면 탐진치는 절로 증발하는 것입니다. 대원관은 그래서 탁월한 수행법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 벽두에 수보리 존자께서 석존에게 성불의 조건을 묻습니다. 석존께서는 “이 무한 우주에 있는 구류(九流)의 무수한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하고 맹세하는 것”이 그 조건이라고 답하십니다. 나는 금강경을 익혀갈 때 벽두의 그 대목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원 자체가 해탈의 조건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겉보기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한 사람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 일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이 일을 통해 나라의 번영에 기여한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 일을 한다고 볼 때 전자와 후자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느껴집니까? 이것이 탐욕(貪慾)과 원력(願力)의 차이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를 한 편 본 일이 있습니다. 주인공 사내는 평생 시청 관리로 봉직했지만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해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찻집에서 발랄한 아가씨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가씨는 심히 우울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왜 그렇게 우울하세요? 사회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보세요.” 하면서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보이면서, “저는 인형 만드는 회사 공장에서 인형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인형을 만들 때마다 전국의 어린이들의 기쁨이 눈에 보입니다. 내가 만드는 인형이 어떤 한 어린이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면 이 일로 기쁨이 솟아요.”라고 충고를 해줍니다.
그 시청 관리는 그 순간 중대한 각성이 일어납니다. ‘아! 나는 이미 평생 동안 시민의 복지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오직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만을 했구나. 그렇다. 나는 무수한 시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보살이다.’ 한 생각 전환이 오면서 우울증이 깨끗이 가시고 다음날 활기 넘치는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출근을 합니다.
나는 매일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활불(活佛)인 나는, 무한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 중생의 행복해탈과 온 존재의 맑고 밝은 기운을 위해 나의 전 존재를 바칩니다.”라고 대원의 기도를 하고 또 하곤 합니다. 이 관념적인 관행이 그 자체로 행복일 뿐 아니라, 나의 마음밭에 이기적인 자아의 뿌리를 근절시켜주고, 보살도의 동력이 되어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지구에 빙하기가 오거나 온 우주가 블랙홀에 다 흡수되어버리는 공겁(空劫)이 올 것인데 다 허망한 일이 아니냐’ 하는 허무의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공겁이 지나고 다시 성겁(成劫)이 시작할 때 우주의 생성 소재는 결국 이전 우주의 에너지일 것 아니냐’ 하는 것이 확연한 직관적 깨침으로 다가오면서 허무의 늪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무튼 유정이든 무정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세상은 맑고 밝은 기운으로 넘쳐야 바람직하고 일체의 유정중생은 행복해탈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기여를 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전 존재를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자, 나를 보면 너무도 좋아하는 녹수, 공덕이와 놀이할 시간입니다. 잠시 이들과 놀아줄 생각을 하니 행복하기만 합니다. 녹수와 공덕이는 제 처소에 있는 어미개와 딸개의 이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