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산책] 신중 이야기3

불교문화 산책/불법의 수호자、오롯이 바라볼 뿐

2007-10-07     관리자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을 잔인한 달로 노래했다. 황무지는 믿음의 부재(不在), 그리고 재생(再生)이 거부된 죽음의 시대상에 대한 노래다. 우리에게 4월은 봄비가 대지를 윤택하게 해주는 청명과 곡우의 절기이다. 눈 녹은 물이 얼어붙은 땅을 적셔 잎새를 피우고, 죽음의 시대를 극복한 생명이 몸짓을 한다.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신중의 출현 배경
신중은 인도 토착신이 7세기 이후 불교에 집중적으로 습합된 것으로, 칠성이나 산신 등 중국·한국의 토속신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세기를 전후해서 고도의 철학체계를 갖춘 대승사상은 철학성 때문에 논리의 홍수에 빠지게 되고 대중들과 괴리된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고 힌두교가 빈 공간을 메우게 되었다. 신중들의 반란이었을까? 대중들은 철학보다는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신중의 아름다움
힌두교는 8세기 들어 브라만, 시바 등에 대한 유신론적 종교로 변모해 불교를 누르고 인도의 지배적 종교가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에서 신중은 8세기 들어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조형물로 현존하는 신중상은 크게 조각과 회화형태로 남아있다.
전자의 경우 탑에 표현된 그것이 압도적이며 사리기에도 부분적으로 표현되었다. 불상 대좌에서 탑으로 표현대상의 변화는 불상 신앙에서 탑 신앙으로의 변모를 읽게 해준다.
후자의 예는 탱화를 들 수 있겠다. 임진왜란을 지나면 토속신을 표현한 신중탱화가 후불탱으로 대거 제작되었다.
초기 신중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코초의 α사원지에서 출토된 불두(사진1)는 빗어 넘긴 머리 위에 조형관(鳥形冠)을 쓴 곱슬머리의 인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으로 추정된다. 대개 조관(鳥冠)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는 두발비사문천(兜跋毘沙門天)일 가능성이 높다.
신중은 이 외에도 불상의 대좌(사진2)나 석탑을 중심으로 활발히 제작되었는데 특히 관덕동 삼층석탑(사진3)은 기단에는 천부를, 탑신에는 사천왕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배치법 대신 상층 기단 각 면에 사천왕과 천부상을 함께 조각하였다. 이것은 정형석탑양식이 완성되면서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의 매수나 규모가 줄어들어 표현공간이 감소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엄사 대웅전 앞 서탑(사진4)에는 기단 상하로 팔부신중과 12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신중의 위계에 따른 배치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불교회화에서 신중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인도의 논리 속의 불교가 아닌 대중에 의해 신앙되고 실천된 불교 그것이 이 시대 불교의 핵심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사진5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범천왕과 제석천왕이 중심을 이루고 부가적으로 변재천과 산신, 일궁천(日宮天), 천녀 등 다양한 신중을 부가하여 표현하였다.
『금강경』에서 주장하는 대승불교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무주심(無住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 우물물에 비친 나뭇가지를 보며 두 손 곱게 모으시던 할머니를 오롯이 바라만 볼 뿐, 바람으로도 존재를 알리지 않던 신중, 신중은 묵묵히 불법을 지켜내는 작은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