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양거사의 섬기행] 보리밭이 넘실대는 섬 청산도

망양 거사의 섬기행

2007-10-07     관리자

완도로 가는 길
알을 밴 보리가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완연한 봄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이다. 싱그러운 봄을 느끼려면 생명력으로 출렁대는 보리밭에 가봐야 한다. 끝없는 보리밭을 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나주를 지나 영암 땅에 이르니 간간이 논보리가 파랗게 자라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를 건너 도미노처럼 질주해 오는 봄은 이미 땅끝마을에 당도해 있었다. 완도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갯펄에는 진초록의 파래가 포구의 봄기운을 더해주고 있다. 완도는 해상왕 장보고가 일찍이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던 섬이다. 다도해라는 이름에 걸맞게 완도군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신지도, 고금도, 약산도, 청산도 등 그림 같은 섬들이 널려있는 고장이다.

이순신 장군의 고금도를 찾아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와 섬이 있기에, 완도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마자 비릿한 갯내음이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는 바닷가 부두부터 찾았다. 완도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청산도로 들어가기로 하고, 우선 서너 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는 고금도행 배표를 끊었다. 고금도와 붙어있는 묘당도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 10월 26일(양력)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잠시 목포의 고하도에 머물다 1598년 3월 23일 이곳으로 진을 옮겨 최후의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섬이다.
배가 완도항을 뒤로하고 신지도와 연결하는 다릿발 아래로 빠져나오니 멀리 고금도와 약산도를 연결하는 ‘약산다리’가 가물거린다. 15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고금도 상정리 선착장! 배 위에서부터 말동무가 된 동네 꼬마들에게 길을 물어 충무리에 있는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을 찾아 나섰다. 한 때 이순신 장군을 따라 몰려든 피난민들이 둔전을 경작하였고 가구 수가 일만 호를 넘었었다는 고금도는 지금도 농지가 다른 섬에 비해 많은 편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을 모신 충무사에 참배하고 그 맞은편 언덕에 있는 ‘이충무공 가묘 유허’ 앞에 서니 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충무공이 다시 나타나실 것만 같았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공의 유해를 아산으로 이장해 갈 때까지 여기 바다가 보이는 묘당도 언덕에 가묘를 만들어 임시로 모셨다고 한다.
묘당도는 매립으로 인해 고금도와 붙어버렸지만 자세히 보면 매립의 흔적이 남아있고 예전에 바다였던 자리엔 지금도 갈대가 자라고 있다. 갈대밭 사이사이에는 억센 삶을 살아가는 아낙네들이 양식한 미역을 봄바람에 말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완도 신흥사
어둑해질 무렵에 완도읍으로 다시 돌아와 미리 연락해둔 신흥사 주지스님께 전화하니 방을 하나 비워두었으니 빨리 와서 부처님께 기도도 하고 하룻밤 묵고 가라 하신다.
공양주보살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늦은 시간이지만 부처님 전에 108배를 하고 따뜻한 방에서 여독을 풀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고는 절 주변을 둘러보니 완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자리에 신흥사는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서 깊은 사찰 바로 뒤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송신철탑이 들어서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날이 새자 행장을 챙겨 아침 8시 10분에 출발하는 청산도행 배를 타기 위해 연안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앞 기사식당에서 백반을 하나 시켰더니 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맛난 반찬이 열 가지도 더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밥상 하나만 보아도 완도 땅의 인심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편제의 섬 청산도
카페리로 한 시간 남짓 걸려서 도착한 청산도! 말 그대로 푸른 섬인 청산도의 도청리 항구로 배가 들어서자 일시에 동네가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남도의 사투리가 정겨운 경찰관 아저씨부터 택시와 버스기사님이 손님을 맞이하는 꾸밈없는 풍경은 나그네의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도청리에서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서니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당리 마을이 낯설지 않다. 언덕배기엔 쌀보리가 무릎까지 자랐고 맥주보리는 이미 이삭이 패고 있었다. 북 장단에 맞춰 남도 소리를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지나가는 서편제의 한 장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찮은 시골길도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의 손을 거치면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운 길로 태어나는가 보다. 당리 마을엔 유일하게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서편제를 찍었던 집으로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당리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읍리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도로변에는 남방식 지석묘 군이 잘 단장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놓여있는 하마비(下馬碑)처럼 보이는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뚜렷이 불상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그 동안 남해의 섬들을 무수히 돌아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부처님의 흔적이 어김없이 남아있었던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리밭
당리 마을 뒤편 언덕을 넘어 도락리로 내려서는 길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감도는 보리밭에 유채꽃까지 어우러져 나그네의 넋을 잃게 한다. 동심으로 돌아가 보리피리를 하나 만들어 불어보니 어릴 적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요즘은 이런 보리밭을 보기가 쉽지 않다. 청산도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삭을 피운 맥주보리가 풍요롭게 일렁대는 언덕배기에 앉아 유리알처럼 투명한 봄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도무지 육지로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풍요로운 섬에 애들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야 할 텐데 노인들만 보이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70년대에는 12,000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청산도에 지금은 고작 2,600명만 산다고 한다.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있고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버렸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보리도 자라지 않을 테고 그러면 섬에 남아있는 싱싱한 봄마저 없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청산도는 아직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봄다운 봄을 선사하고 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