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몽골 4 초원에서 만난 부처님들

불국토 순례기/몽골4

2007-10-07     관리자

봄이다. 봄의 불청객인 황사도 빨리 찾아왔다.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몽골 땅 밟았다 해서 달라진 생각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몽골 고비사막에서 발원한 황사가 중국을 거쳐오면서 갖은 오염물질을 실어 나르는 것에 대해 환경문제 운운하며 불평을 터뜨리고 있을 텐데, 이제는 몽골 사람들이 먼저 걱정된다.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두가 한 몸이라는데, 깨닫기 전에는, 아니 적어도 실질적인 인연을 맺기 전에는 그저 무심하게 살아가다가도 인연이 닿으면 달라지는 게 인지상정일 터 내 변화무쌍함에 위안을 삼는다.
울란바토르에서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의 뻬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13세기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가는 장장 8시간의 여정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폐사지에 복원불사를 위해 세워진 어워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자 마자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광활한 초원뿐이다. 양떼들, 도로까지 점령한 소떼며 낙타떼를 만난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푸르고 누렇고 붉은 초원의 기기묘묘한 색상의 변화에 감탄사를 연발하자, 돌고르잡이 “저 빨간 것은 제흐트라는 풀인데, 비타민이 풍부해서 가을에 양들이 먹으면 건강해진대요. 저기 양들 사이에 염소 보이지요. 느리게 걷고 같은 장소에 머물고 싶어하는 양떼들을 움직이기 위해 염소가 필요한데, 염소들은 닥치는 대로 다 먹어치워서 초원을 사막화시켜서 걱정이에요.”라고 말한다.
스물세 살인 그녀가 풀이며 양과 염소의 특성까지 파악하고 있는 점에 놀라워하자, “저도 유목민인데요.”라며 겸연쩍게 웃는다.
그렇게 차창 밖의 풍광에 취하고, 돌고르잡의 이야기에 취해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부그데 지역의 어워(오보)가 발길을 잡았다. 사찰의 일주문처럼 세워진 기둥은 하닥으로 감쌌고, 위에는 법륜과 두 마리의 사슴이 마치 “이곳은 절입니다.”라고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계단을 올라가 보니 어워와 불전함뿐이었다.
“몽골에 700개 정도의 사원이 있었는데, 소련 공산당이 다 파괴해버렸다. 이 곳에도 석탑과 절이 있었다. 새로 복원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기에 불전함에 지폐 한 장을 넣으니 미소로써 답한다.
한 부부도 선뜻 시주를 하기에 물어보니, “불교가 부흥해야 우리 몽골이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한다. 우리가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솔롱스(무지개)”라며 반가워한다. 몽골인들이 우리 나라를 무지개라고 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주로 높은 곳이나 고갯길, 마을의 중요한 길목에 있는 어워는 그 지역의 수호신과 대지의 주인의 거주처로서 알타이계통의 민족에게 폭넓게 퍼졌었다. 우리는 근대화한답시고 다 없앴는데, 몽골은 여전히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해 부러웠다.
한편 폐사지 복원불사를 위한 어워라, 이 또한 몽골불교의 특색이자 저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몽골불교는 어워뿐만 아니라 샤머니즘의 갖가지 신들도 다 받아들여 만신전(萬神殿)을 만들었고, 용과 8류의 대지와 물의 주인을 만들어 신심을 북돋웠다. 하기야 모든 강물이 흘러들어 한 맛이 되듯 세상의 온갖 이치를 포용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 아니던가.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 처음에는 그야말로 유쾌 통쾌 상쾌하였는데, 짐짓 무료해지려고 하던 참에 구 롱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치 미국 서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판자집이 이채로웠다.
그러고 보니 팍스 몽골리카나,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닮은 데가 있구나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나라는 물질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고, 또 다른 나라는 참으로 소박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르헝이라는 가게에 들렀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몇 차례 두드리자 열어준다. 물건도 별로 없다. 6, 70년대 우리네 시골 가게를 연상시켜 옛추억에 잠겼는데, 달라이라마와 몽골 대통령 사진, 불구(佛具)들이 진열대 윗자리에 모셔져 있어 눈이 번쩍 뜨였다.
“공산화 때는 집안에 숨겨놓고 비밀리에 불공을 드렸는데, 개방화된 이후 신앙의 자유가 생겨 너무 좋다. 가게에 모셔 놓고, 부처님께 아이들 건강하게 해주시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이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는다. 불교가 더욱 발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아주머니(할타르 씨)는 한국의 불교잡지사에서 왔다고 하자 손까지 잡아주신다.(아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단다.) 요구르트를 얼려 만든 아이스크림과 과일주스를 마시며 초원의 광활함이 빚은 막막함을 달래면서 두어 시간을 내달려 산사라 지역에 도착했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몽골인들이 연신 우리를 쳐다보며 웃는다. (호기심이 많다더니…) 수타차와 골랴시, 최방, 셜, 만두, 풍투지(잡채) 등 몽골 음식을 골고루 시켰는데,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음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유목민의 척박한 삶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음식에서부터 만인 평등을 실현한 듯해 오히려 반가웠다.[한국에서 가져간 김치 덕분에 겨우 양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돌고르잡도 암트테(맛있다)를 연발, 김치를 매우 좋아했다.]

소욕지족의 삶에서 희망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에 드문 드문 박혀 있는 겔(몽골의 전통 천막집)도 운치를 더하는데, 겔 방문은 몽골 여행의 백미다. 다른 나라에서 불쑥 남의 집을 방문했다가는 경을 칠 일이겠지만, 손님에게 몽골 사람만큼 극진한 이들도 없는 것 같다.
결혼한 큰아들이 우리를 맞이하였는데, 마유주(아이락)를 권하면서 “일년에 풀을 찾아 네 차례 이동하면서 산다. 겨울에는 여기보다 더 큰 겔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겔 입구 맞은 편 가운데 궤(櫃) 위에 불상사진을 넣은 액자, 말그림 액자(큰아들 작품)와 마니주 통, 시계 등이 있고, 중앙에는 난로, 왼쪽과 오른쪽에 침대, 입구 바로 오른쪽에 찬장과 마유주 통, 말린 고기가 매달려 있었다.(겔 천정 중앙은 뻥 뚫려 있는데, 예전에는 천정 지지대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소욕지족이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을 듯싶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좁은 곳에서 대가족이 함께 생활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태생부터 수행자 같은 그들의 미소에 짐짓 부끄러워졌다.
새로 머리까지 감고 전통의상인 델로 갈아입은 아주머니는 손녀딸도 예쁜 옷으로 갈아입혔다. 사진 촬영 후, 손녀딸이 태어난 지 1년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졸지에 돌사진을 찍어준 셈이니 우리도 기분이 좋았다. 마유주 한 통을 담아주던 아주머니,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그네들의 인정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으로 향하면서 그네들의 평화로운 삶, 행복한 미소가 계속 아른거렸다. 현대인들의 더 편리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향한 욕망의 불길로 인해 지구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데, 그네들의 소욕지족의 삶이 문제해결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우리들의 희망은 욕망, 집착 버리기, 모두가 인드라망 그물코처럼 연결되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깨닫고 더불어 잘 사는 수행자 되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