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에도 우리는 부부

보현행자의 세상 사는 이야기/ 아름다운 황혼

2007-10-07     관리자

6·25 의 잿더미에서 4·19혁명을 치른 나라의 건강 상태는 중환자실의 환자나 다름없었다. 남의 나라 원조로 나라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정치는 싸움판, 사회는 혼란, 노름과 술타령으로 망해가는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다행히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지하철이 깔리고, 아낙들의 긴 머리 잘라 가발 만들어 수출하고,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려 봉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고, 하루가 다르게 솟아나는 공장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희망을 잃었던 온 국민이 새마을정신으로 똘똘 뭉쳐 5천년의 가난을 벗어 던지니 세계가 놀랐다.
이 시절 나는 공무원이었다. 아내가 싸준 보리밥 도시락을 먹으며 이따금씩 봉급 대신 밀가루 배급을 타면서도 날로 성장하는 나라의 모습을 보며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젊음이 용솟음치고 내가 세상 주인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귀하고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을 나 혼자 쓸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생명의 탄생이 이렇게 천차만별일 수 있을까. 태자처럼 고귀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구걸하며 살아가야 하는 천한 인생은 어째서일까. 백년도 살기 어려운 인생살이가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회의가 깊어질수록 일상생활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틈나는 대로 책방에 들러 필요한 책을 사다 읽었지만 그 많은 세계의 석학들도 내 마음 속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러던 1973년 늦가을 어느 날 어머님께서 오셨다. 고향에서 절 신도회 총무, 회장 일을 보신 분이라 저녁상을 물리시자마자 “여기서 제일 가까운 절이 어데 있노?” 하신다. 이튿날 어머님을 모시고 삼각산 봉국사에 가서 법문을 들었다.
“왜 나서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러면 왜 태어나는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태어나는 거요.” “그러면 그 업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눈·귀·코·입·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이 집착 때문에 업이 생기는 거요. 이렇게 해서 나고 죽고, 또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이오.”
이 순간 나의 가슴을 짓눌렀던 의문이 얼음 녹듯 녹아내렸다. 스님께서는 모든 존재는 반드시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상의상관의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인과응보, 연기의 법칙에 관하여도 쉽게 풀어주셨다. 그 날 법회는 오직 나를 위한 법회인 듯했다. 이후로 불교는 내 삶의 중심에서 언제나 소중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었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초봄 경기도 여주 농촌마을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지었다. 집사람과 집그림 그리기에 몇 밤을 새웠다. 2층 양옥집을 그렸다가 아담한 한옥집을 그렸다가 결국은 30평짜리 오두막 그림으로 집을 지었다.
강가 조약돌을 주워 화단을 만들어 꽃을 피웠더니 온갖 나비와 벌들이 떼 지어 모여들어 자기들이 주인이란다. 심어놓은 나무에는 이름 모를 예쁜 새들이 날아들어 노래하며 둥지도 틀고 새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연 속에 불심 가득한 집사람과 함께 있으니 여기가 도량이 아닌가.
올해로 정년퇴임한 지도 벌써 10년을 맞이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심 돈독한 집사람을 평생의 도반으로 만난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불광사와 인연하여 수많은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세 아이 학교 뒷바라지만 해도 밤이 짧은데 몇 밤을 새워가며 리포트 쓰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집사람의 불심이 지금까지 나를 부처님 곁에 머물게 해주었다.
나는 내생에도 내 아내로 집사람을 찍어놓았다. 다음 생에도 집사람과 함께 깨달음을 향해 정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김치국부터 마신 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변하기로 작정했다. 평소에 생각해두었던 절 수행을 올해부터 하기로 하고 청견 스님이 쓴 『절을 기차게 잘 하는 법』을 꼼꼼히 읽고 집사람의 절 시범을 눈에 익힌 다음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절을 하자마자 엄지발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순간 박장대소로 깔깔거리는 집사람이 얄밉기도 했지만 몇 년 전 봉은사 미륵대불조성기원법회에서 세 번씩이나 삼천배를 올린 집사람이 대통령보다 더 높아보였다.
보름 동안 절 연습을 열심히 하고 지난 1월 17일 새벽 5시 반 조용한 시간에 절을 시작하였다. 바닥 짚는 소리가 요란하고 숨결이 거칠었지만 108배를 성공했다. 절은 할수록 매력이 있는지라 올해 목표를 3천배로 삼았다. 오늘도 목표달성을 위한 108배를 마치고 이마의 땀을 씻으며 현관을 나와 마당에 나서니 해지는 서쪽 하늘 아름다운 황혼 들녘에 청둥오리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유재웅 님은 평생을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0년 전 퇴직, 도심을 떠나 현재 여주 농촌마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평생의 도반 보현성 보살님과 함께 정진하며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하시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