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산책] 신중 이야기2 - 인왕

불교문화 산책- 불법의 수호자, 신중

2007-10-07     관리자


인왕과 호국신앙
인왕은 이왕(二王),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불리는데, 금강저 또는 금강저를 들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집금강(執金剛) 또는 금강수(金剛手)로 의역되며, 범어로는 바즈라파니(Vajrapani) 또는 바즈라다라(Vajradhara)라고 한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35년(613)조와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선덕왕 5년(636)조에는 황룡사에서‘백고좌도량’을 베풀어 『인왕경』을 설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호국법회는 주로 인왕(仁王)에 의한 국토의 수호가 목적이었고, 그 인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본질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이해보다는 범(梵)과 아(我)가 하나되는 호국불교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인왕은 좌우로 쌍을 이루는데 오른쪽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아형(阿形: 입을 벌린 채 공격하는 모습), 왼쪽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훔형(입을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의 인왕이 배치된다. 또, 아형 금강역사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라 하여 천상의 역사(力士)로서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한다. 훔형 금강역사는 밀적금강(密蹟金剛)으로 언제나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하며, 온갖 비밀스러운 사적(事跡)을 알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인 중도(中道)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공격은 방어를 수반해야지, 어느 하나만을 고집했을 때 조화는 사라지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의 아름다움
인왕은 오백신중(五百神衆)을 이끌고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이다. 사천왕, 팔부신중과는 달리 관이나 갑옷을 입지 않고 상체는 맨몸을 드러내고 하체만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 도상적(圖像的) 특징이다. 사진1은 열반에 든 부처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불전도의 한 장면이다. 좌우 2기의 기둥에는 상하의를 모두 착용한 제자들과는 달리 상체를 벗은 2구의 인물이 역동적인 자세로 부처를 응시하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나형(裸形)의 인물은 신체를 신성시 했던 그리스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으로 고대 인도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경우 초기 인왕은 대부분 석굴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2).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가장 밖으로 부터 인왕, 문수·보현, 아난·가섭을 배치한 것뿐만 아니라 사천왕과 흡사하게 갑옷과 악귀를 밟고 있는 자세는 수문장의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한국 석탑은 경주 서악 삼층석탑, 장항리 석탑과 같이 인왕을 문비(門扉) 좌우로 배치하는 형식이(사진3) 보편적이나, 8세기를 지나면서 사천왕, 팔부중, 사방불 등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울러 석굴암 인왕상과 같이 상체를 벗고 있는 건장한 역사의 표현에서 점차 갑옷과 무기를 착용한 무장(武將) 형식으로(사진4)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반야(般若)를 바탕으로 한 호국에서 점차 국토수호 내지는 현실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호국으로 본래 의미가 변질되어 가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호법은 중생을 제도하고, 지켜내는 것이지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왕의 부릅뜬 눈이 두렵지 않은 것은 “열반이 방편일 뿐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 한다”,는 「여래수량품」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 모두가 불국토이며, 부처님 가르침을 해(害)하는 무리일망정 멸(滅)이 아닌 화(和)의 대상으로 바라 본 반야의 호국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