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양거사의 섬기행] 불모산(佛母山)이 있는 섬 사량도

망양거사의 섬기행

2007-10-07     관리자

봄이 오는 섬
매서운 추위가 지나간 겨울의 끝자락에 서있는 남도의 섬엔 벌써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겨울이 길고 추위가 매서울수록 매화 향은 더욱 짙은 법인가. 사량도의 불모산 자락에는 매화가 짙은 향기를 머금고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에 뒤질 새라 바닷가 마늘밭에는 싱싱한 마늘이 파릇파릇 물이 올라 봄을 재촉하고 있다.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범부들도 이맘때 쯤이면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한 마리 나비되어 유채꽃 만발한 남국의 섬마을로 달려가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휴일을 이용하여 따뜻한 남쪽나라 사량도로 내달렸다.
사량도로 가는 물길은 가히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한려수도의 통영시 구간이다. 나그네를 실은 ‘2000사량호’가 통영 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하여 통영대교 아래의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자 북쪽으로 호수와 같이 잔잔한 고성군 자란만이 펼쳐진다.
자란만은 음력 2월 영등철이면 감성돔이 알을 낳으러 오는 곳으로 어자원이 풍부한 수산자원의 보고이다. 멀리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 너머로 북쪽 해안을 따라 보이는 삼천포 화력발전소 근처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상족암이 있다. 그 오른쪽의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는 임진왜란 당시 소비포라 불렸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제1차 출전 때 거제 옥포를 치러 가면서 하룻밤 정박하고 지나간 아름다운 포구마을이다.

역사와 전설의 고장
해거름 햇살을 안고 배가 사량도로 접근해 들어가자 병풍처럼 생긴 거대한 산이 역광으로 우뚝 바티고 서있는 모습이 당당하기만 하다. 저 멀리 은빛으로 반사되는 물결 위엔 추도와 두미도가 확연하고, 남쪽 태평양 쪽으로는 욕지도와 연화열도의 수많은 섬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량도는 경남 통영시 사량면에 속하는 유인도로 상도와 하도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수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고려 말에 최영 장군이 사량도에 진을 두고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촌 마을에는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함대가 전라좌수영인 여수를 출발하여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할 때 반드시 사량도를 거쳐 갔었다. 이 곳 사량도 금평리는 이순신 장군이 당포해전에서 승리하기 하루 전날인 1592년 7월 9일(양력) 함대를 정박시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하룻밤 자고 간 곳이다.

토굴에서의 하룻밤
배는 사량도 아랫섬의 양지리와 덕동을 경유하여 윗섬의 금평리에 도착했다. 첫발을 내디딘 금평리 진촌 마을! 예전엔 한적한 섬마을이었으나 옥녀봉과 지리망산(智異望山, 일명 사량도 지리산)을 등반하려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노래방과 여관까지 생겨 부산한 포구로 변해버린 곳이다. 날이 저물기 전에 거처를 정하기 위해 옥녀봉 아래의 암자인 옥련암으로 가려고 스님에게 전화를 하니 시원한 목소리의 스님이 선착장까지 손수 마중을 나오셨다.
옥련암은 말이 암자이지 수행자가 기거하는 토굴 움막이다. 들어서는 입구에서 주인은 내게 이곳은 누추하여 철저한 하심(下心)을 하지 않고는 머물기 어려운 곳이라 하셨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응답하면서 흔쾌히 토굴로 들어섰다. 나그네를 위해 주인은 토굴 방에 장작불을 때어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밥도 손수 지어 주셨다. 일거수일투족이 수행자의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다 가운데 이토록 험준한 산세가 있는 것이 기이하다. 가련한 옥녀의 전설이 있는 옥녀봉, 시집갈 때 타고 가는 가마처럼 보이는 가마봉, 용이 살았다는 용굴이 있는 불모산(佛母山), 그 아래 옥련암이 있다. 사량도는 전체 섬의 모습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아주 옛날에는 용태도(龍胎島)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타 지역 사람들이 여기서 큰 인물이 많이 날 것을 시기하여 용을 뱀으로 바꿔 섬 이름을 사량도(蛇梁島)라 고쳤다고 스님이 귀띔해 주셨다.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빛나는 기암괴석들을 올려다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모두가 살아있는 자연불이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찬찬히 바위들을 바라보니 그 속에는 미륵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약사여래불의 형상이 다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이 산의 이름이 왜 불모산인지 늘어선 바위들이 말없이 일러주고 있다.
적막한 토굴의 황토방에서 따뜻한 흙냄새 맡으며 하룻밤 단꿈을 꾸고는 스님과 단 둘이서 부처님 전에 새벽 예불을 올렸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늘에 총총히 박힌 수많은 별을 본 지도 이 얼마만이던가. 무명에 잠든 중생들을 깨우는 청아한 목탁 소리가 산과 바다에 울려 퍼진다.
아침나절에 섬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돈지리 쪽으로 돌아가니 멀리 세존도가 가물거리고 남해도 금산과 미조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바다는 거리를 측정하기 어렵다지만 이렇게 가까이 금산 보리암이 다가설 줄은 몰랐다. 아! 이 근처 바다는 모두 부처님의 법이 전해진 곳이구나.

옥녀봉의 전설
돌아오는 길에 옥동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벼랑을 오르내리며 옥녀봉 방향의 산등성이를 타니 남북으로 모두 찬란한 바다와 섬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사다리와 줄에 의존하여 험준한 가마봉을 넘어 옥녀봉에 섰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동냥젖을 얻어먹으며 자란 옥녀가 예쁜 처녀로 성장하자 천륜을 저버린 아버지가 옥녀를 범하려 했던가 보다. 그러자 옥녀는 여기 아슬아슬한 봉우리에 올라 몸을 날렸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상하게도 옥녀봉 주위로 그 날 까마귀 한 마리가 슬피 울면서 맴돌고 있었다. 옷깃을 여민 채 잠시 벼랑 끝에 서서 옥녀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하산하는 길에 보니 능선을 기준으로 확연한 경계를 이루면서 북쪽 대항 해수욕장에는 아직도 바람이 찬데 남쪽 사면에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해변의 마늘밭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온 봄의 교향악은 이미 사량도 언덕바지에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