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빼앗긴 시선을 거두고

특집/수행의 첫걸음

2007-10-07     관리자

옛 사람은 말하였다. “도(道)는 초발심(初發心)의 직심(直心)이면 통하느니라.”
또한 선서(禪書)에서 말한다. “도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있지 않느니, 안다면 망상(妄想)이고, 모른다면 무명(無明)이니라.”
장미꽃의 비유가 있다. 사람이 많이 알면 개량된 장미꽃에 지나지 않아 그만큼 초발심의 향기가 줄어든다. 초발심대로가 좋아서 도를 이룬 뒤에도 초발심으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한 옛사람이 적지 않다. 장미는 개량될수록 향기가 줄어든다. 최근에 유럽 꽃시장에는 여러 색깔의 장미꽃이 선을 보였다. 특히 한 송이에 꽃잎이 각각 다른 색깔로 핀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주위의 밝고 어둠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
허나 아쉬운 점은 야생의 장미 향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벌레가 먹은 야생 장미꽃에는 향기와 빛깔이 온전한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외부 적의 침입에 맞선 강렬한 생명력 때문이며 적응력 때문이다. 차츰 배우고 익힌 초발심자의 경우도 이와 같다. 오래된 사람은 노숙한 반면, 야성의 청순미, 초발심의 풋풋함이 줄어든다. 얻은 것이 완숙이라면 잃은 것은 초발심이다.
텅빈 공간의 여백에 불안해 하는 사람이 있다. 맑고 깨끗한 초발심같은 여백인데 자꾸 채워야만 직성이 풀린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순수한 야채 음식의 맛은 담박하며 소금맛이 위주다. 고유한 야채맛을 낸 사찰 음식은 많은 조미료를 쓰는 식당 음식과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한 요리에서 많은 야채를 뒤범벅하여 쓰지 않는다. 초발심은 이런 것이다.
“천하불자 비세인(天下佛子 非世人) 불구재색 제유루(不求財色 諸有漏) 속불혜명 도중생(續佛慧命 度衆生) 시즉충천 대장부(是卽衝天 大丈夫)” 천하 불자는 세인과 다르나니 재물과 여색, 유루법을 찾지 않느니라.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 사람이 바로 충천하는 기상을 지닌 대장부니라.
옛날 인도 설화의 한 토막. 전지전능한 신 브라만이 있었다. 맨 처음 사람에게는 행복을 거저 주었다. 이 때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빈둥거리고 놀았다. 행복에 취하여 할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제석천의 신은 사바세계 사람의 게으름을 보고는 행복을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저 깊은 푸른 바다 속에 숨겨둘까?, 저 높은 산 위에 숨겨둘까?’
미래에는 산과 바다를 사람들이 정복해서 행복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다시 머뭇거렸다. ‘사람들이 가장 찾기 어려운 곳이 어디지?’ 이 때 제석천이 찾아낸 곳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렇다, 마음이다. 사람 자신과는 한치도 떨어져 있지 않은 데에 숨겨두자!’ 제석천은 스스로 만족하였다.
이 설화의 교훈은 가장 가까운 데서 시작하여 본래의 마음, 소박한 마음, 초발심을 통해 행복을 얻는다는 점이다. 그럼 공부의 시작은?
첫째, 무엇보다 먼저 바르고 좋은 스승의 선택이다. 세상 일에 하찮은 짚신을 엮는 데에도 스승이 있는데 도를 닦는 데에 스승이 없을 것인가. 초발심자경문 첫 줄에서 말한다. “처음 발심한 사람은 모름지기 악지식(惡知識)을 멀리하고 현인(賢人)과 선인(善人)을 친근히 하여….”
『법화경』에서는 수지(受持), 독(讀), 송(誦), 해설(解說), 서사(書寫), 등 다섯 가지 선지식 법사(法師)가 나와 있다. 풀이하면 경전을 잘 정리해서 장서(藏書)한 스승, 경전을 잘 읽는 스승, 경전을 범성(梵聲)으로 소리 높여 잘 외우는 스승, 경전 법문 강의를 잘하는 스승, 경전 사경을 잘하는 스승이다. 정리하면 안목(眼目)이 트인 스승이고 선지식이다.
『서장(書狀)』을 쓰신 대혜 종고(大慧宗巾) 선사는 아침마다 선지식의 한 말씀 끝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기를 발원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화두선(話頭禪)의 대종장(大宗匠)답다.
공부는 좋은 스승을 가리는 데서 벌써 판가름 난다고 본다. 거리에 나서면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잘못 가르쳐주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 길 안내는 한 번으로 그치기에 다행이나 세세생생 윤회의 길에서 헤맬 것을 생각하면 아찔한 노릇이다. 매일 선지식(善知識) 만나기를 발원하면서 초발심의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발심은 곧 이러한 겸손한 자세이다. 그리고 이 겸손한 자세는 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둘째, 자신답게 사는 일이다. 남의 이목(耳目)에 팔려 겉치레로 사는 일상의 삶은 이제 쉰다. 무엇을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귀다툼하고 사는가. 긴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단 하루라도 좋다. 밖으로 빼앗긴 시선을 거두고 안으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보람있는 시간이다. 성스러운 묵언(默言) 속에 자신을 지키는 삶이 수행자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