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복에는 집도 챙길 수 없나 봅니다”

자비의 손길

2007-10-07     관리자

가끔 도심이나 고속도로에서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시간에 쫓기는 조급한 마음과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소음공해, 배기가스로 인해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그 고통을 감수해내며 운전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김종원(54세) 씨가 쓰러진 것은 7년 전이었다. 다들 쉬는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시민의 발인 버스를 운전하기 위해서 출근하였다가 갑작스레 뇌출혈을 일으켰다. 복잡한 도로환경과 승객의 안전을 위한 긴장의 연속, 촉박한 배차운행시간으로 인한 휴식 부족과 불규칙한 식사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20여 년 동안 꼭두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장시간 버스를 운행했으니 병이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이 운행을 나가면 이런저런 걱정에 한시라도 마음을 편하게 가진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어쩌다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서운함보다는 얼마나 피곤하면 저럴까 싶어 안쓰러움이 더했지요. 차라리 쓰러지고 나서는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평생 고생만 했으니 이제 푹 쉬라는 뜻으로 여겼지요.”
지난날의 회한에 젖는지 부인 이종열(50세) 씨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김종원 씨는 당시 뇌출혈로 인해 왼쪽 편마비 상태로 비록 직장은 잃었지만, 다행히 의식은 되찾아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남편의 몸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남편 퇴직금과 대출금을 합쳐 경기도 안산에 처음으로 집 장만을 해서 우리 네 식구 정말 가족답게 서로 위해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음의 평화에서 진정한 행복이 찾아지는 것일까. 이종열 씨는 덩그러니 집 한 채만 있었지, 고혈압을 앓고 있는 몸으로 네 식구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아파트 청소를 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자연 병이 생기게 되었다.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오더니 퇴행성관절염이 생겼다. 자신의 몸은 고단해도 아이들이 착하게 커주고 마음이 편안하니 세상살이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지나고 딸(27세)은 산부인과 간호조무사로서 시집 갈 나이가 되었고,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 3년제 대학 임상병리학과에 다니는 아들(24세)도 군대를 제대하고 졸업이 1년 남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6개월 전 딸의 혼사가 오가던 때, 김종원 씨가 장애인인 본인의 모습이 딸의 시댁식구들에게 편견으로 보여질 것을 걱정하여 무리하게 운동하던 중 뇌출혈이 재발하여 또다시 쓰러지게 되었다.
기존의 왼쪽 편마비에 이번에는 오른쪽 마비증상이 겹쳐 사지마비 상태로서, 인지장애까지 발생하여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침대에 누워 있는 김종원 씨를 보니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목과 오른쪽 가슴에 3~4개의 튜브를 연결해 항생제나 영양원, 씹지 않고 삼킬 수 있는 유동식(流動食)을 공급하고, 가래를 끊임없이 빼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손바닥 크기만 하게 3군데나 발생한 욕창이 등과 허리 쪽에 번지고 있어 수시로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데, 살갗이 짓눌려 터진 것 같은 욕창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욕이었다.
“남편은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예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니 옆에서 24시간 간병을 해야 됩니다. 대소변 치우고 가래 뽑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서 자세를 바꿔주고 눈빛 한번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힘에 부치네요. 한창 나이에 예쁜 옷, 화장품 하나 사지 못하는 딸에게 미안하고, 낮에는 학교 가고 밤에는 아르바이트 하느라 잠 한 숨 못 자는 아들에게도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